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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나 Jun 24. 2024

골드핸즈

오늘 읽은 책 :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 - 나태주, 유라

요즘 비우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비우다 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새롭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찾게 된다.

매달 책을 사서 책장을 채워두던 일을 잠정중단했다. 들어갈 공간도 없고 책에 질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고 싶은 책이 너무나도 많다.

최대한 책을 사고픈 욕구를 가라앉히고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먼저 읽어본 후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책을 구입한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라면 중고책으로라도 구할 수 있으니 나름 아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이번에 읽을 책도 도서관에서 대여를 한 책이다.

이 책을 들고 카페에 왔다.

<골드핸즈>라는 카페인데 이곳은 수제케이크도 먹을 수 있다.

이 카페에 갑자기 들른 이유는 쿠폰 때문이다.

여려 지갑을 가지고 다니다 하나로 통일하고 가지고 다니는데 카페 쿠폰도 들어 있었다.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스탬프를 모은 것.



정말 오랜만에 온 곳이다.

자리도 넓은 편이고 단체석도 있어서 예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종종 왔었다.

아이들에게 케이크를 먹이고 손에 색연필 하나 쥐어주면 나는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온 시간은 점심시간 때라 그런지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예전에 왔을 때랑 구조가 좀 달라진 것 같다. 큰 틀은 바뀌지 않았지만 함께 왔던 벗과 앉았던 자리는 사라졌다.

퍼즐 맞추는 걸 좋아하는 벗은 150피스를 앉은자리에서 모두 맞췄다.

그것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모든 것이 비슷해 보이는 조각들을 맞추면 그림이 되는 것이 경이롭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벤치형 의자는 아이들이 누워도 될 정도로 넓다. 테이블은 작지만 앉는 자리는 널찍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작업도 하고 책도 읽기로 했다.






오늘 읽은 책은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이라는 시화집이다.

나태주 시인과 가수 유라의 합작품.

소제목이 달려 있었다.

'인생의 여행길에서 만난 노시인과 청년화가의 하모니'

걸스데이의 유라가 그림을 그렸구나.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계절을 다룬 시화집인 만큼 사계절이 다 나온다.

1부는 '봄이 피고', 2부는 '여름이 흐르고', 3부는 '가을이 익고', 4부는 '겨울이 내린다'로 각 부마다 20편의 시가 실려 있다.




봄은 푸르고 싱그럽다.

그림들이 전체적으로 다 푸르다.




'봄'편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인생 1>



인생 1


화창한 날씨만 믿고

가벼운 옷차림과 신발로 길을 나섰지요.

향기로운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따라

오솔길을 걸었지요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길

막판에 그만 소낙비를 만났지 뭡니까


하지만 나는 소낙비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날씨 탓을 하며 날씨한테 속았노라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좋았노라 그마저도 아름다운 하루였노라

말하고 싶어요

소낙비 함께 옷과 신발에 묻어온

숲 속의 바람과 새소리


그것도 소중한 나의 하루

나의 인생이었으니까요.




탓을 하며 살고 싶진 않다.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

밤이 되어 하루를 돌아봤을 때 후회가 없는 시간을 보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여름은 파랗다.

이 아름다운 그림을 이렇게 밖에 표현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스럽다.

더 예쁜 단어들이 많을 텐데.



'여름'편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어떤 흐린 날>



어떤 흐린 날


어디 먼 나라에라도

여행 온 것 같아요


방파제 너머 찰싹이는 바닷물이

너의 말을 들었다


그래 그래 지금 우리는 지구라는 별로

여행을 온 거란다


발밑 바람에 흔들리는 개망초꽃이

나의 말에 귀 기울였다


나 떠난 뒤에 너라도 오래 살아

부디 나를 생각해 다오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을

너는 듣지 못했다.



이 시집에 '개망초꽃'이 자주 등장한다. 계란프라이를 닮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꽃.

내가 떠나더라도 개망초꽃은 오래오래 살겠지?

나는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더위를 별로 안 타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냥 여름이 좋다.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기간이다. 집순이인 내가.





가을이 왔다.

가장 풍성한 계절. 먹을 것이 가득하고 자연이 가장 예쁘게 뽐낼 수 있는 계절.

노을이 생각나는 계절.




'가을'편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하나만 꼽기가 힘들었다.

계절의 순서대로 읽다 보니 가을 편이 가장 좋은 시들이 많았다.

그중 <가을과 마주 앉아>라는 시가 가장 좋았다.



가을과 마주 앉아


읽어야 할 세상의 책들이 볏낱가리만큼 쌓였는데

아무런 책도 한 장 펼쳐보지 못한 채 이렇게

좋은 가을을 흘려보내고만 있습니다


갚아야 할 세상의 빚들이 산더미만큼 높아졌는데

누구한테도 한 푼 갚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렇게

빈 하늘만 쳐다보며 일생이 저물고 있습니다


가을이시여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오늘 또 세상의 일은 귀먹은 듯 잠잠하고

멀리서 태풍 소식만 요란스럽다 그러합니다


가을이시여 오늘은 당신 하고라도 마주 앉아

녹차나 따습게 우려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만들어내며 마셔볼까 그러합니다.



흔히들 가을은 외로운 계절이라고 한다.

책을 가장 많이 읽기도 하는 계절인데 홀로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가을보다는 겨울이 책 읽기가 더 좋지 않나?

추워서 밖을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겨울이 딱이다만.




한 편으로는 아쉬워서 한 편 더 읽어볼까 한다.

<구름지도>라는 시다.




구름지도


가을이 깊어지면 산속 다람쥐들은

거울 양식으로 가을열매나 씨앗들을 주워

땅속에 굴을 파고 모아둔다 그런다

(이미 우리가 아는 이야기다)


마지막 작업을 마치고 나서는

하늘을 우러러 거기 떠있는 구름 한 장을 정하여

먹이가 있는 곳의 위치를 기억해 둔다 그런다

이른바 구름지도인 셈이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구름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다람쥐들은 끝내 구름지도를 잃어버리고

먹이가 묻혀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만다 그런다

그래서 봄이 되면 엉뚱한 곳에 도토리나무나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어린 새싹들이 무더기로 생기기도 한다 그런다

다람쥐들의 어리석음의 공로인 셈이다

(더욱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또다시 저물어 가는 가을,

나도 다람쥐들처럼 구름지도 한 장

가슴속에 마련해 두고 살고 싶다

구름지도를 올려다보는 다람쥐 같은

맑은 눈동자를 꿈꾸며 살아가고 싶다.





다람쥐는 구름지도 한 장 들고 세상을 살아가나 보다.

어디서나 보이는 구름을 따라 먹이를 찾고 굴을 파기도 하는.

한량처럼 보이는 다람쥐가 부러울 따름이다.





마지막 겨울이 왔다.

겨울은 차갑고 냉랭하며 회색빛이 떠오른다. 



그림들 역시 애처롭게 홀로 있는 그림이 많다. 눈에 쌓인 집도, 하얀 눈 사이에서 우뚝 솟은 나무 한그루.

시 역시 외로움이 느껴지는 시들이 많았다. 

겨울은 한 해를 마무리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해를 알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시는 <원점>이라는 시를 골라보았다. 



원점


오늘은 월요일

새로 일주일

여행을 떠납니다


오늘은 1일

새로 한 달 치

여행을 떠납니다


오늘은 1월 1일

1년짜리 조금은

긴 여행을 떠납니다


언제나 무사히

한 바퀴 돌아

이 자리로 오게 하소서.





시를 다 읽고 나면 그림 목록이 나온다. 

각 계절마다 동그란 원안에 그림을 품고 있다. 

이 페이지는 또 다른 작품을 보여준다. 


중학교 시절, 시화전이 열렸다.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그림과 함께 전시하기로 했다. 

국어 선생님과 교내 몇몇 학생들이 방과 후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글씨를 맡아 썼는데 오타가 생길까 봐, 실수를 할까 봐 잔뜩 긴장하며 썼던 기억이 있다. 

예정된 일정이 다가오고 복도와 중앙현관에 내가 쓴 글씨들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학생들이 오며 가며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또다시 긴장했다. 


하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면 항상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일단, 뱉었으니 이제 평가만 남았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은 발표하고 난 후 쫄깃한 심장을 부여잡고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 같다. 

그 쫄깃함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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