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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광고일뿐

by 김수달

직장이란 게임, 플레이어는 누구?

테트리스 게임을 가끔하는 수달, 길쭉한 블록을 홀드(hold)시켜 놨다가 여러줄을 한방에 지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다 문득 수달도 게임같은 세상 누군가에게 옮겨지고 채워지는 아케이드 블록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인생은 게임같다 말하고들 하는데 직장 속 김수달은 플레이어일까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캐릭터일까?


원래 없던 것처럼 끝나는 행사

직상생활에서 이뤄지는 이벤트의 9할은 사전준비다. 행사를 예로 들어보면 모든 장비 설치, 참여자 섭외, 동선 확보, 리허설, 자료 보고가 행사 전에 이미 다 이뤄진다. 정작 당일엔 리허설 정도가 할 일의 대부분이며 막상 행사가 시작되면 담당자가 할 수 있는건 없다. 열심히 준비한 대부분의 행사는 특별한 이슈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행사가 끝나면 허탈한 기분마저 든다. 무엇을 위한 준비였는지 무엇을 위한 수십번의 자료수정이었는지 떠올려 볼 여지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고 나면 나 자신도 흩어지는 느낌이 든다.


마치 차곡차곡 쌓은 블록이 길죽한 블록 하나에 모조리 사라지는 테트리스 게임같다. 대단한 일인냥 준비한 행사가 순식간에 지나가면 수달 자신은 정작 없어지고 만것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갈아 넣는다'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행사나 회의를 준비해온 담당자 입장에서는 '수고했어'란 상사 말로 이 시원섭섭한 마음이 온전히 가시지 않는디.


말을 해야 알지

그래서 사람들은 티를 낸다. 고생한 티, 노력한 티, 힘들단 티를 말이다. 일이 끝나면 남는건 없단 걸 알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어필해야 자신을 블록으로 쓴 사람이 조금이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된단걸 아는 것. 지나가버린 회의와 행사는 본인조차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 순간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힘들었어요' 라고 한참 지나 얘기해본들 '그랬어? 몰랐네 얘기하지'란 말만 돌아올 뿐이다.

'알아 봐 주겠지'는 없었다

수달은 의기소침한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목소리 내는데 익숙하지 않은 세대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써서 모르는게 있어도 질문하지 않는 그런 학창시절을 보낸 수달이다. 이 세대의 특징이라면 질문을 할때도 진짜 모르는걸 질문하는게 아니라 알고 있는걸 확인하는 식이다. 정글같은 세상속에서 자기 PR이 쉽지 않다. 있는그대로 내가 한 일들을 홍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모든 일은 여러명 또는 여러부서가 협업할 수 밖에 없기에 자칫 숟가락 얹기로 보여지는 행동에 대한 자기검열 때문에 목소리 내는걸 조심하기도 한다. 이벤트는 셀수 없이 많고, 지나가버린 이벤트가 남기는 건 현장사진 한두장 뿐이다.


집요하게 쨉을 날리자

영리한 사람들은 일을 시작할때 부터 조건으로 내건다. 인사와 관련된 게 대부분. 김수달은 그러지 못했고, 그러지 못한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지도 못한 소심한 수달이었다. 수달은 자기옷에 안맞는 옷을 입고 어색하게 행동하기 보단 꼼꼼히 상사에게 보고하는 쨉을 날리는 것으로 존재감을 각인시키기로 했다.


'이번 회의 자료 준비는 무리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해당 부처(부서)에서 자료제출에 난감을 표하긴 했습니다만 000수준에서 내용을 조율하였고, 관련자료는 받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으니 상관인 니가 해봐'라는 식의 쨉 보고는 안좋다. 두괄식으로 일이 잘 되고 있다고 안심 시키는게 가장 우선, 그 뒤에 이슈가 있었음을 말하고 담당자 선에서 잘 처리 했다는 경과보고까지 하는게 베스트다. 이슈만 덜컥 드러내면 상사는 '나보고 어쩌라는거?'라는 식으로 불안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슈를 담당자 선에서 최대한 해결하고 나서 이런 이슈가 있었지만 해결이 되었다는 식의 보고를 함으로써 이 일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게 아니라 우여곡절이 많은데 내가 잘 해결하고 있다는 걸 상사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당당하게 걷기

언젠가 수달도 선배들처럼 별거 아닌 행사로 이곳저곳에 티를 내야만 할 일들이 생길까? 왠지 모르게 당당해 보이지 않아 보였던 선배들의 걸음걸이를 수달도 닮아갈까? 아직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수달같은 쪼랩도, 연차 가득한 선배들도 결국 크고작은 블록같은 정글같은 직장 속에서 현명한 생존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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