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ㅡ내가 느끼는 ‘좋은 사람’은 사회적 위치나 재정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별로 튀지 않고, 마음이 넓고, 정답고, 남의 어려움을 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삶을 다하고 죽었을 때 신문에 기사가 나고 모든 사람이 단지 하나의 뉴스로 알게 되는 ‘유명한’ 사람보다 누군가 그 죽음을 진정 슬퍼해 주는 ‘좋은’ 사람이 된다면 지상에서의 삶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에세이스트 장영희(1952~2009) 전 서강대 교수의 산문에서 고른 문장들을 실은 『삶은 작은 것들로』에서.
중앙일보 아침의 문장, 2025.3.25(화) 28면.
이 글을 보고 '사회적 위치나 재정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별로 튀지 않고, 마음이 넓고, 정답고, 남의 어려움을 잘 이해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 내 주변에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이 떠오른다. 두 분 다 개인적인 친밀도가 깊지 않은 분들이다. 최근에 같은 조로 묶여 잠깐 함께 활동해 본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좋은 사람' 하니까 이 분들이 떠오르는 것은 이 분들이야말로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분은 요양보호사로 활동하신다. 조용한 성품에 항상 웃으신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거나 의견을 내놓는 일도 없다. 그런데 언제나 긍정적으로 협조하신다. 주변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내신다. 어떻게 다가가도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은 따뜻함이 있다. 아무 말 없이 껴안아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면서 가만히 기다려줄 것 같다. '좋은 사람' 아닌가.
또 한 분은 화가이시다. 크게 이름난 화가는 아니지만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다. 나는 그분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분의 그림에는 땀이 있고 진실이 있다. '양파꽃과 똥파리'가 그분 그림의 일관된 주제이다. 생명의 신비와 순환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림을 좋아해서 화가가 되었지만 어려운 시절에는 학비와 생계 때문에 그림을 마음껏 그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늦게라도 붓을 놓지않고 열심히 그리는 것이라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그분의 그림에서는 예술 또한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이고 철학임을 볼 수 있다. 그분도 항상 웃고 있다. 말은 없지만 눈이 마주치면 늘 웃어 준다. ' 좋은 사람'아닌가.
장영희 교수님이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되어가는 것을 새삼 헤아려 본다. 생사를 달리 하신 지가 오래되었구나. 언제나 환하게 웃는 사진으로 뵙는 게 전부였지만 교수님의 글은 불편한 당신의 삶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감싸주었던가. 교수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교수님은 '좋은 사람'이셨다.
나는 누구인가 생각한다. 나는 ' 좋은 사람' 인가.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면서 진정으로 슬퍼해 줄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는 은근슬쩍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이 넓지 않고, 다정하지 않으며, 남의 어려움보다 내 어려움을 더 잘 불평하는 사람임을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해도 해도 되지 않는 '좋은 사람'되기를 포기해야 할까. 그래도 '좋은 사람'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매일매일 선택해야 하는 나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