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공 Mar 01. 2023

수녀가 사랑한 동네

봄처녀 오셨네, 큰 사랑을 주고  가셨네

"수녀님! 이 근처에 살고 있어요?"

일동은 올레길에서 산책을 하다 운동시설에 하늘 걷기를 타고 있는 수녀를 발견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고, 더구나 수녀님이 운동을 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도로 건너편 언덕에 있는 성당에 있어요."

수녀는 웃으며 일동의 물음에 답했다.

"우리 성당에 놀러 오세요."

"저는 불교 신자인데요?"

"괜찮아요, 놀러 오는데 종교가 어떻고 따지지 않아요."

"알겠어요, 집에서 가깝고 해서 운동삼아 한 번 가볼게요."

"그래요, 이곳은 공기도 좋고 나무나 꽃들도 있고 참~ 좋네요."

"이곳에는 언제부터 오게 되었나요?"

"이 지역 성당에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주변 지리와 동네도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요?"

"아, 그러시군요."

"어쨌든 좋은 동네에 사시네요."

"다들 살기 좋은 동네라 그러더군요."

"앞쪽에 우뚝 솟은 산은 근엄한 아버지와 같고, 뒤쪽에 동네를 감싸 안은 듯한 산은 다정다감한 어머니와 같아요. 형제님! 이 아름다운 곳에 산다는 것만으로 축복이에요."

"그래요?"

"이 아름다운 햇살을 받고 너무나 행복해요,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 천국이 따로 없군요."

"수녀님께서는 마치 시인 같군요, 그리고 나무 같아요."

"무슨 나무죠?"

"금방 햇살이 너무 좋다고 했잖아요, 햇살을 비추는 태양을 향해 쭉쭉 뻗어나가는 대나무 같아요."

"호호호! 대나무라? 좋네요, 땅을 단단히 하고 몸은 온갖 도구로 쓰이게끔 헌신하죠."

"수녀님은 정말 그런 헌신적 사랑이 느껴져요, 행복하고 즐거운 기분이 와닿죠."

"그래요, 이 올레길을 걸으며 콧노래가 나오고 기분이 명랑해지죠.

자꾸만 정감이 넘쳐, 수다스러워지고요."

"사시사철 느낌이 또 다른 게 이 올레길의 특징이죠."

"그래요? 어떻게요?"

"봄에는 벚꽃이 화려하고, 여름에는 매미들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을은 울긋불긋 단품이, 겨울은......"



일동은 한참 동안 지켜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면서, 오늘 만난 수녀의 모습이 강렬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 즐겨 읽던 책에서 수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 역시 수녀였고 문학을 사랑하며 에세이집을 냈기에, 그 책에서 수녀의 많은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수녀는 병원 호스피스로 봉사활동하시는 분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간호하며 돌보았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도 문학을 사랑하며 문인들과의 만남도 수시로 있었다.

큰 스님의 만남, 시인과 만남, 그리고 추기경도 한 말씀이 있었다.

사회 봉사 활동을 하며 본인 자신도 암으로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며, 추기경도 대단한 수녀라고 했다.

추기경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큰 스님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큰 스님도 수녀도 다 같이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일사천리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일동이 아는 수녀에 대한 지식의 전부이고, 그것도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또 수녀를 만났다.

일동은 수녀를 만난 후, 수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수녀도 수녀지만, 성당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천주교는 교리와 계율에서 불교와 다르지만, 신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불교와 비슷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에게 행하는 사랑의 실천이 구원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한다.

또한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바로 우리들 곁에 있다고 했다.

천국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볼 수 있다는 것이 불교에서 부처님이 우리 모두가 부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상세계에서도 모든 신앙은 종교적 교리에 갇혀 있는 신앙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 모든 것의 기본이며,

종교는 오직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사상적으로 불교와 같이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배웠다.

국가나 인종, 종교가 다르다거나 사상, 종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고 인류가 오직 참 사랑과 평화 속에 만날 수 있는 화합이 길을 제시하였다.

일동은 천주교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 상당히 고무적이었고 뿌듯했다.

불교에서 자비의 정신을 배웠다면, 천주교에서는 참된 사랑을 배웠기 때문이다.



일동은 올레길을 산책하며 수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무척 궁금했다.

일주일은 지난 것 같았다.

수녀가 있다고 하는 성당에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나요?"

성당에 들어서니,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묻는다.

"수녀님을 뵈러 왔어요."

일동은 최근 만났던 수녀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아! 이사벨 수녀님을 말하시는군요, 어쩌나! 지금 없는데..."

"어디 가셨나요?"

"수녀님은 서울 큰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셨어요, 정기검사이고 암치료도 받아야 해요."

순간, 일동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활발하며 건강관리를 잘하시는 수녀가 암과 투병 중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깐, 안으로 들어오시죠. 말씀을 자세히 전해야 할 것 같은데...."

성당의 안내자는 차 한 잔을 권하며 수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수녀는 이곳 성당에 휴양차 온 것이라고 한다.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치료를 받으러 서울에 올라갔지만, 언제 올지 기약이 없다고 덧붙였다.

일동은 성당을 나오며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진하게 느껴본 사람의 향기를 담은 수녀였기에, 봄은 너무나 짧고 온 듯이 가버렸다.

그리고 최근에 일련의 상황들이 정말 무엇에 홀린 듯이 전개되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그 수녀와 일치하는 암투병과 만남, 그런 것들이 아주 똑같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빼닮을 수가 있단 말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헷갈릴 정도였다.

지금 현실이 이렇게 책의 내용과 같이, 철저히 사실적으로 닮아간다는 것은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책에서 읽은 그 수녀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다시 현실에서 재생되다니.....

수녀에게서 일동은 한결 마음이 편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살아나는, 마치 도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몸이 병들어 치료하기에도 힘든 상황에 자연을 노래하고, 남을 생각하는 배려심에도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수녀들의 발병의 원인도 궁금했다.

상당한 수녀들이 이러한 중병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발병의 원인은 열악한 환경과 노동에 기인한다는 의견이 많다.



가톨릭 교회가 이상적이고  사랑만 충만한 것도 전부가 아니었다.

중세기 유럽 교황청은 권력을 등에 업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 없는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이른바 마녀사냥이란 만행을 저질러 왔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하느님께 몸을 바친 수녀들은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의 몸이 망가지도록 하는 것을 교황청의 암묵적 태도와 방관도 어쩌면 마녀사냥이상으로 나쁘다고, 일동은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수녀들에게 희생과 강요로 고통을 안기고 있음은 종교의 어두운 그림자다.

빠르게 변모해 가는 시대적 변화 상황을 인지 못하는 종교계도 문제다.

요즘은 스님이나 수녀가 되겠다는 사람이 없어 종교계 일각에서는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종교도 사람이 만들었고 계율과 경전, 또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교리, 계율, 경전, 도덕 및 메시지도 많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구습, 고리타분한 악습은 사라지고 샹큼하고 신선한 의식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

이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다면 종교라는 그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위기가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일동은 성당을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일련의 상황을 이렇게 느꼈다.

그리고 동네에서 만난 수녀의 이미지는 가슴속 깊이 들어와 앉았다.

수녀에게서 느끼는 즐겁고 생생해지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그녀의 숨소리조차 숭고하게 들렸다.

수녀가 동네를 예찬하는 생명의 소리는 도시 속에 자연이었고, 축복이며, 환희고, 사랑이며 자비였다.

정말 이러다가 그녀를 몽땅 사랑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를 만나면서 생생한 활기와 함께 살아있는 영혼의 소리에 화들짝 놀란 심장의 맥박이 느껴졌다.

어쨌든 수녀와의 만남은 지친 삶에 생명의 생생한 활기를 불어넣었고, 위안과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녀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우주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처럼 수녀의 사랑은 엄청나게 큰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일동은 수녀에게서 큰 사랑과 함께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녀가 이 동네에서만 노래 부르고 사랑하였을까.

아니다, 수녀는 이 세상 모든 사람, 세계 모든 곳, 천지강산, 산천초목 모두를 사랑했을 것이다.

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종교에서 사상적으로 매우 열린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종교가 융합과 조화의 전통으로 이해가 되었다.

이러한 의미는 융합과 조화 속에서 불교적 가치의 구현과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과 일치한다.

마치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처럼 일동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그 수녀와의 첫 만남 느낌은 조선시대에 파격적이고 자유인처럼 행동한 경허 조사를 연상케 한다.

어쨌든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수녀의 큰 사랑을 온몸으로 느꼈다.

요즘 사회의 일각에서 대립과 대결이 난무하는 속에서, 진정 필요한 큰 사랑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이런 큰 사랑이 사회적으로 번져 나가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일찍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이 큰 사랑의 의미는 어쩌면 모든 종교나 종파를 떠나, 세상 사람들에게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와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전 07화 어울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