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차이.
"여보! 다음 주 금요일 아버지 제사인데, 당신 올 수 있어?"
순덕은 달력을 넘기며 묻는다.
"응~근무일이지만, 파트너와 상의해서 가도록 할게."
신중히 답한다.
"부담되면, 안 와도 돼!"
냉정히 잘라 말한다.
"아니, 좀 있어 봐~ 상의한다고 했잖아?"
좀 마음이 거슬린다.
"알았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건강이 우선이니까..."
생각해준다.
매년 장인어른 제사 때면, 늘 수재와 순덕이 먼저 와서 제사상 차려 놓으면 뒤늦게 동서들이 나타난다.
따지지도 않고, 또 서운해하는 마음도 없다.
그냥, 장인어른 제사에만 전념한다.
다만, 동서들이 뒤늦게 나타나서 이러쿵, 저러쿵, 왈가불가할 따름이다.
오늘도 장인 제사를 앞두고 그렇게 이야기가 되었다.
수재는 장인어른과 아내를 처음으로 본 그때를 회상했다.
"안녕하세요. 정수재입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반가워요. 순덕아! 너도 인사를 해야지."
자리로 당기며 권한다.
"안녕하세요."
수줍음을 많이 탄다.
처음 만난 순간, 반했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미모는 아내가 나름대로 자기를 만들어낸 꾸밈의 예술이었다.
왜냐면 지금 아내의 모습과 옛날의 모습은 판이하기에, 변신의 변신을 거듭해 왔는 것이다.
여성의 꾸밈이란 그 과정이 은근히 숨겨져 감추어질 때 더 아름다운 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그 꾸밈의 예술을 정확히 표현해내는 재주를 가진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었다.
집에서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기에, 그냥 옛날 청순한 처녀의 이미지이지만, 어느 날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화장을 하면, 그 놀라움은 한층 크며 더욱 예뻐 보인다.
이러한 아내의 기술은 비단, 화장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가미되어 척척박사고, 만물박사다.
이 모두가 아들 없는 장인어른께서 딸을 아들로 만들었다는 결론밖에 볼 수 없다.
어쩌면 나와 아내의 만남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처가 좋으면, 처갓집 말뚝 보고 절한다'는 말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아내도 아내지만 장인어른이 더욱 친근감이 갔다.
결혼하게 된 것도 다 장인 덕이요, 장인어른의 각별한 사위사랑을 몸소 느꼈었다.
안타깝게도 단명하셨기에, 수재는 더 이상 좋은 추억을 만들지 못했었다.
처가는 세 자매가 전부이며, 아내는 맏이로서 늘 집안 걱정을 했었다.
심지어 결혼 때도 집안 신경을 썼는지 피부가 거칠고, 곱지 못했다.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것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수재 역시, 그런 아내가 신경이 쓰였다.
수재는 맏사위로 처가를 늘 생각을 하고, 처갓집 일이라면 최우선이었다.
순덕은 아버지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내는 장인어른에 대한 말과 태도는 자뭇 냉정하게 해왔었다.
장인어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늘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내는 아버지를 보며 남자 못지않게, 자신을 강한 여자로 만들어 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그립고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며, 지난 시절 아버지에게 못해준 효도, 애정 등 그런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순덕은 아버지가 집안에 불만이 많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에,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했었다.
그 당시에는 가부장적인 제도가 굳건히 서있는 시대적 상황이었기에, 딸만 셋 있는 처지로 밖에 나가면 늘 기가 죽고, 집에 들어오면 갑갑하고, 외롭고 쓸쓸했을 것 같다.
"아이고~ 정서방 왔네."
장모님이 반색을 하며 반긴다.
"잘 계셨습니까?"
꾸벅 절을 했다.
"동서들은 안 보이네요?"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형부! 안녕하세요?"
둘째 순애가 반긴다.
"좀 늦을 거예요."
셋째 복순 처제가 답하며 말을 잇는다.
"형부! 군기 좀 잡으세요."
동서들 잡으라는 말이다.
"다들 무슨 일이 있겠지, 뭐..."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다들 빨리빨리 먹고, 돌아가서 내일 출근 준비해야지."
순덕이 나서 마무리한다.
이렇게 장인어른 제사는 상황이 종료된다.
처갓집 일은 항상 아내가 시작하고 끝을 낸다.
집으로 오면서 수재가 묻는다.
"오늘 당신 기분 괜찮아?"
"좋고 나쁠게 뭐 있어? 늘 그대로지..."
무덤덤하게 말한다.
"장모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던데..."
걱정이 앞선다.
"엄마는 늘 그래, 몸이 좋으면 다니고..."
침울하게 말을 잇는다.
"작년에 다친 다리가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같아."
"몸이 안 좋으니, 꼼짝 않고 있는 거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한다.
"골다공증이라, 넘어지면 쉽게 뼈가 금이가고 큰일이네."
수재는 안타깝다.
"지금 엄마가 몸을 제대로 못 가누고 있어. 간호를 하던, 모시던 해야 할 것 같아."
핵심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모시면 되지"
간단하게 말한다.
"당신, 금방 모신다고 했어?"
따지듯이 묻는다.
"그래!"
즉답이다.
"어이구야, 양가 부모님 다 모시겠다?"
비아냥거린다.
"아픈데 어쩌겠어, 아니면 요양 병원에 모시던지..."
차츰 핵심을 벗어난다.
"아직 요양병원에 모실 단계는 아니야!"
잘라 말한다.
수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내 말처럼 장모님이 거동이 불편하지만, 요양병원에 입원시킬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에 모신다 해도 아내가 반대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시로 장모님 챙기고 처갓집에 거의 살다시피 해야 한다.
좀 생각이 복잡해진다.
아내가 나서겠지만, 맏사위로서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문득, 아내의 지나간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우리 집 사위들은 비겁해! 남자답지 못하고..."
"아니, 왜?"
즉시 물었다.
"꼭 말을 해야 하나?"
답답한 듯 말한다.
"도무지 남자들이 나서질 않기에, 내가 나서서 다 처리하잖아!"
"나서면 맘에 안 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마지못해 답한다.
또 한 번은 아내가 자기 친구 부친상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생각났다.
그날은 아내가 무척 흥분이 고조되었다.
"진짜, 남자들은 이 시대에서 뭘 하는 존재인지 모르겠어."
"아니, 왜 갑자기 남자들을 문제 삼는 거야?"
궁금했다.
"점순이 남편이 점순이에게 말을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충격받았어!"
"뭐라고 했는데, 누구에게?"
"점순이가 뭐꼬, 무식하게 시리~ 이러잖아?"
"아니~ 남의 부인 이름도 아니고, 자기 부인 이름을 문제 삼는다고?"
정말 놀랐다.
"그래, 오히려 자기가 무식한 거지, 제정신인지, 정말 어처구니없었어."
"진짜 무식하네~ 어떻게 자기 마누라에게 그런 말을..."
수재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그 소리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어."
여전히 흥분된 상태로 말을 잇는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데, 그 말은 처갓집 전체를 욕하는 거야."
"정말 남의 마누라도 아니고 제 마누라한테 못할 소리를 했네."
아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보다 못해, 내가 한마디 했지!"
상기시키며 말한다.
"기만 씨는 그렇게 엉뚱하게 기고만장하라고 이름을 기만으로 지었어요?"
쏘아붙였다.
"그랬더니?"
아내의 용기에 감탄했다.
"어쩌겠어? 정확히 핵심을 찔렀는데."
속이 시원한 듯 말한다.
"당신 잘했어! 역시 당신다워."
별 할 말이 없을 때 이게 최고다.
"말도 말이지만, 그 남자 머릿속에 있는 정신상태가 문제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슨 정신?"
갑자기 궁금해진다.
"무슨 정신이겠어? 가부장적인 꼰대 정신이지."
"......"
할 말이 없다.
한마디로 지나친 가부장 의식이나, 성차별 의식에서 커온 가부장 집안의 사람이고, 무능하고 억압에 찌든 어설픈 사회의 남성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수재는 처가에 대하는 사위들과는 달리, 친정뿐만 아니라, 시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아내가 자랑스러웠다.
아내의 그런 모습이 어머니와 거의 흡사하다.
어머니와 아내의 공통점은 부드러운 여자의 이미지였지만, 시댁과 친정이라는 집안의 내력에서 강한 여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세 아들을 둔 어머니는 남편까지 합치면 네 명의 남자를 거느려야 하기에, 굳건하고 막강한 포스가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아들 없는 처가의 맏이였기에, 당당한 아들 역할을 해야 했었다.
가부장적 제도가 강제로 씌어 놓은 억압의 굴레를 어떻게든 시원하게 벗어던지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왔다.
특히, 강한 신념과 의지만이 가부장적 친정과 시댁에서 여성차별 굴레를 홀연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남자가 강하다고 해서, 여자가 약하게만 살아가야 된다는 법은 없다.
여자가 약하다고 해서, 남자가 군림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며 차이가 날 수는 있어도, 차별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시댁과 처가, 가문에서 부터 가족에 이르기까지 절대 있어선 안될 일이라고 생각을 하며, 나부터라도 솔선수범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