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하여
주말 저녁엔 처가 가족행사에 참석했다. 처 고모부님의 팔순잔치였다.
한쪽 벽면에 산수연 현수막이 걸리고, 다른 벽면에는 고모부님의 일대기가 프로젝터를 통해 흘러갔다. 직계 혈족과 방계 가족 서른 명 남짓 모인 저녁식사였다.
처 고모님과 고모부님, 장인어른과 장모님, 작은 어머니께 인사드리는데 모두 반갑게 맞는다. 그간 고생했다며 다정히 안아주신다. 올해 봄 사고사로 아들을 잃은 작은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끝내 눈물을 보이신다.
나와 두 딸에게 항상 애틋하고 도타운 정을 보이신 분이다. 요즘 슬픔이 새록새록 자라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더 큰 슬픔이 찾아든다고 한다.
"미안해, 나서방 앞에서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주책없이 울면 안되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네."
"괜찮습니다. 작은 어머니.
슬픔을 참지 마세요. 우시고 싶을 때 마음껏 우세요."라고 말씀드리는데, 내 눈시울도 붉어진다.
며칠 전, 친구 로맨스 박이 14시간에 걸쳐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오디오북으로 들었다고 했다. 35년전 대학때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의 종이책으로 읽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회사 32살 남자 직원이 하루키 광팬인데, 매일 하루키를 읽으며 하루키 찬양을 한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다 다시 읽게(듣게) 되었다.
마지막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끝난다.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질문을 받고 막막하기는 똑같다.
불완전하고 슬픔을 머금은 청춘, 그게 그때만의 감성인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삶이 그러하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
죽음이라는 큰 상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분에게 '죽음은 해뜨고 바람부는 자연현상같은 것'이라고 위로드릴 수는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헤아린다면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조언드릴 수는 없다.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에게 충실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겐 세월이 자연스럽게 가르칠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견디고 슬픔을 치유하는 법을 스스로 배우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