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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Jun 25. 2024

반만 뛰다 돌아온 날

달리기와 생각 많은 자의 궁합

어제 오랜만에 달리니 다리가 아직 얼얼했다. 그래도 마음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있어서 오늘은 이어서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날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오후에 시간이 나서 냅다 나갔다. 막 뛰려고 폼 잡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나의 답을 기다리는 듯한 내용의 카톡이었다. 생각을 좀 비우려고 뛰려고 했는데 그 직전에 카톡이 오니깐 괜히 기분이 거슬렸다. 일단 읽씹하고 런데이앱을 켜고 걷기 시작했다. 운동할 때만이라도 스위치를 끄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혹자는 나보고 예민하다고도 하고, 혹자는 나보고 남 신경을 많이 쓰고 산다고도 한다. 나는 실제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생각 만으로 하루를 온전히 보낼 수도 있는 파워 공상꾼이다. 그 생각은 미래를 향할 때도 있고, 과거를 곱씹을 때도 있다. 미래를 향할 때는 희망과 행복을 그리기에 즐겁지만, 과거를 곱씹을 때는 주로 자책이 많아서 에너지를 많이 쓰고 종종 우울해진다.


달리기 직전 왔던 카톡 내용은 어떤 주제에 대한 내 의견을 궁금해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이제 좀 덮고 싶은 사건이 내 생각 표면으로 다시 끄집어내졌다. 런데이 앱에서 성우가 '이제 10분간 뛰세요.'라고 외쳤다. 골몰히 생각하던 나는 이제 제발 생각의 꼬리를 멈추고 뛰자는 생각으로 발을 빨리 놀렸다. 찹 찹 찹  뛰는 내 발자국 소리와 양 옆의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성우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뛰세요.'라고 계속 외쳤다. 그 말 자체가 나를 다시 생각의 늪으로 빠뜨렸다. 다시 나는 카톡에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을 그르쳐서 미안하다는 사과멘트로 시작해야 할까? 내 마음이 속상하다는 아이 메시지로 먼저 시작해야 할까? 나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겠다고 나의 결심을 적어야 할까? 그냥 애매한 이모티콘 하나만 보내고 말까? 나는 10분 내내 달리면서 생각을 비우지 못했다. 오히려 골몰했다. 계속 골몰하다가 이 모든 게 합해지는 적당한 문구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멈췄다. 성우는 두 번째 10분 달리기를 시작할 타이밍이라고 외쳤다.


나는 달려서 오늘의 미션을 완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두 다리를 땅에 붙인 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심혈을 기울여서 지웠다 썼다 하면서 카톡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본 다음 심호흡을 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제야 생각이 멈추고 불편한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나서 달리기를 재개했는가? 아니 그냥 기가 빨려서 걸어서 돌아왔다.


비록 달리기 완주는 못하고 중도포기했지만, 달리면서 생각이 완전히 집중되는 경험을 한 날이었다. 생각 많은 내가 생각을 비우기 위해서 달렸는데, 오히려 생각을 모으는 행위로도 달리기가 된다는 느낌이 신선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인정하기로 했다.


생각이 많은 게 뭐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생각을 모아가고 내 생각에 충실해지는 내 삶을 존중하며 더 찬란하게 가꾸고 싶다. 그 길에 달리기가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생각으로 마무리한 나는 천상 생각쟁이가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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