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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MI Oct 22. 2022

왜냐면 사랑하니까

이제 갓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의 학교 시간표는 낮 12시 40분에 멈춰있다. 학교 수업이 다 끝나면,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방과 후 활동을 위해 옆 건물로 이동한다. 베를린 정부는 맞벌이 부모를 위해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아이들의 방과 후 학교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3학년부터는 일정 금액의 회비를 내야 한다.) 그래서 보통 초등학교는 방과 후 활동을 하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두고 관리한다. 다행히 나의 프리랜서 직업이 인정을 받아, 우리 아이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오후 4시까지 방과 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그곳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놀이터나 학교 공터에서 놀기도 하고, 각 교실에 마련되어 있는 만들기, 그림 그리기, 독서, 실내 스포츠, 블록 쌓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또한 요일 별로 제공되는 그룹 수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숙제를 할 수 있는 방에 앉아 그날의 숙제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정해진 스케줄 없이 그날그날 아이의 컨디션과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셈이다. 여섯 명 정도 되는 보육 교사들이 자리를 지키며 아이들을 보살폈지만 모든 아이들을 일일이 살피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아이를 데리러 온 모든 부모는 아이가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안팎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총 여닐곱개의 방, 또는 놀이터나 학교 공터를 다니며 어디선가 놀고 있을 아이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참 신기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불규칙적인 모양새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 아이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저 멀리서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도 어김없이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그렇게 아이를 쉬이 찾고 나면 살며시 아이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러면 아이도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더 놀고 싶은 아쉬운 눈망울을 하고서.

늘 그렇듯 나는, 신나게 노느라 흙투성이가 된 아이의 바지를 손으로 털어주기도 하고 흙모래로 뒤덮인 아이의 운동화를 거꾸로 뒤집어 와르르 모래를 쏟아내기도 했다. 잃어버린 물건은 없는지 다시 한번 아이의 사물함을 휘 둘러보고는 그제야 학교를 나섰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우리 둘은 지하철 역 플랫폼에 서서 열차를 기다렸다.

" 엄마는 진짜 사람이 많아도 너를 딱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어. " 별생각 없이 아이에게 툭 던진 말이었다.

" 그거 뭔지 알아. 다른 사람은 까맣게 보이는데 나만 색깔로 보이는 거 말하는 거지? "

" 너 그런 것도 알아? 맞아. 다른 사람은 다 안 보이는데 너만 색깔로 딱 보여. "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살짝 웃어 보였다.

" 근데 왜 그렇게 너만 색깔로 보이는 줄 알아? "

나의 질문에 아이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 응, 알지. 왜냐면 사랑하니까. "

맞아, 하고 아이를 품 속에 넣어 꼭 안아주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본다.

카메라는 종종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 순간을 연출한다. 주인공과 마주 앉은 상대방의 얼굴에선 갑자기 밝은 빛이 비치고, 뒤에선 후광이 발산된다. 주인공의 시선에만 슬로 모션이 작동되어 사랑하는 이의 얼굴 표정과 몸짓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흑백 처리가 되거나 움직임이 멈추지만, 오직 사랑하는 이의 모습만은 총 천연색으로 아름답게 물들며 세상의 중심이 되어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장면을 보는 것 만으로 극 중 인물이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가 실감 나게 느껴지곤 했다.

언젠가 먼저 유부녀의 세계로 건너간 친한 언니로부터 믿을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가 그녀의 남편을 처음 만났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니는 어떤 모임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강의실에 앉아있었다고 했다. 그때 강의실의 문이 열렸고,  남자가 걸어 들어왔단다. 그런데  남자의 뒤로 눈부시게 밝은 빛이 환하게 비추더랬다. 그에게 눈에 반한 언니는 머지않아 그와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에 성공했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그의 외모는 준수한 편이었지만, 소위 연예인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의 머리 뒤로 뿜어져 나오던 환한 빛은 오직 그와 사랑에 빠진 그녀의 눈에서만 아름답게 반짝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남편을 처음 만났던 순간, 그의 얼굴에서만 환하게 비치는 놀라운 빛을 보았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배경이 될 뿐, 내 두 눈은 오직 환하게 빛나고 있는 그의 얼굴로만 가득 채워졌다. 그제야 그 언니의 경험담이 결코 허구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성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아채기도 전에 이미 나의 두 눈은 내가 사랑에 빠진 순간을 정확히 담아내고 있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놀라운 기적이다.

사랑은 평범한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흑백으로 가득했던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물들게 한다. 사랑은 누군가의 멈춰있던 시간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차갑게 굳은 마음을 따뜻한 온기로 녹여내기도 한다. 진즉에 이춘수 시인은 이 위대한 기적의 순간을 담백한 글로 잔잔히 풀어냈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서로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무관심 속에 그저 지나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더니, 소중한 친구가 되고 아름다운 연인이 되고 귀한 이웃이 되었다. 별안간 길에 버려진 불쌍한 강아지도 어떤 이의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누군가의 사랑 어린 위로는 삶을 포기할 뻔한 이의 생명을 살리기도 했다. 지금도 온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들 속에는 분명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사랑이 깃들여있을 것이다.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은근하지만 힘이 있다. 이 위대한 사랑의 기적이 각자의 삶에 멈춰 있지 않고 곳곳에 흘러넘치면 좋겠다. 흐르고 흘러 다시 땅을 향해 내려오는 물방울처럼 우리의 사랑도 끊임없이 돌고도는 아름다운 순환고리를 만들어 내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도 어두운 흑백 배경 속에 숨어 사는 이들이 누군가의 눈을 통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날이 오길, 나아가 그 누군가가 내가 되고, 동시에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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