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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빛과 실, 그리고 연꽃

by 정린

느지막한 아침, 별생각 없이 침대 옆 트롤리에 놓여 있던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을 집어 들었다.
노벨상 수상 강연문으로 시작해 정원의 식물들을 돌보는 일기로 이어지는 이 책은 작고 얇다.

많은 글을 쓰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작가의 감정 가까이에 닿을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책을 몇 날 며칠을 출장 가방 속에 넣고 다녔지만

단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아마도 억지로 활자를 눈에 흘렸다면,

오늘처럼 스며드는 여운은 없었을 것이다.

점심 즈음 책을 덮고, 오늘 가보기로 마음먹은 연꽃단지로 향했다.
날도 덥고, 멀지 않은 듯 멀고, 낯선 길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몇 년이나 미뤘던 곳이었다.
만개는 아니었지만, 하얗고 연분홍빛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고,

커다란 연잎들이 군집을 이루며 장관을 이뤘다.
연잎 모양의 접시가 있다면 하나쯤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앞 풍경이 매혹적이었다.

연꽃은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꽃이다.

찻잔을 닮은 꽃의 형태,

큼직하고 둥그런 연잎의 모양과 크기도 참 탐스럽다.
무엇보다 연꽃이 품고 있는 의미들이 어릴 적부터 마음을 끌었다.

그때는 그 뜻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3년 봄에 산 숫타니파타 책 중에서, 석지현 옮김]


숫타니파타라는 불교경전의 이 구절을, 한동안 이메일 서명에 넣은 적도 있다.
보통은 아무도 서명에 신경 쓰지 않지만,

사회초년병의 태가 남아 있던 무렵,

어느 상사가 내게 답장을 했던 기억이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너무 혼자서 가지 말고, 가끔씩 같이 가야지. 그래야 재미도 있고, 사는 맛도 있고...”

그 답장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 이후 언젠가 서명을 지웠다.
그 상사는 연차 차이도 꽤 있는 분이어서

내게 위로를 건네려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새로운 부서 일에 적응도 해야 했고

엄마가 세상을 떠난 즈음이라
나는 그런 문장에서 의연한 삶을 살아갈 힘을 얻어 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글귀가 누군가에게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 시절 나는 사회생활이란 내 자아의 취향을 적당히 지우거나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연꽃 꽃잎 모양의 먹그릇]


연꽃밭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마저 읽었다.
이런 책을 자주 읽으며 살아간다면,
나도 연꽃 같은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흙탕물 속에서도 제 빛깔로 피어나는 그런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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