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어릴 땐 의식하지 못하다가 동생이 자라고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이 남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고, 낯가림도 심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도 무서워하고 운동도 잘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가정에서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들은 스스로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때론 가정에서 너무 귀하게 자란아이들 일수록 학교생활을 하며 자신에게 실망한다. 자신은 생각보다 그렇게 똑똑하지도 예쁘지도 않다는 것을 스스로 타인과 비교하며 알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지나친 칭찬과 과보호도 아이들에게 그리 건강하지는 않다. 자신이 알던 세상과 진짜 세상의 괴리가 너무 크면 아이들만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아들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느리고 답답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움츠려 들고 자신없어 하며 회피하려고만 했다. 그러면 언제나 나는 아들에게 "엄마도 그랬어. 엄마도 너 만할 때 학교에서 입도 뻥긋 못했어. 엄마는 지금도 높은데도 무서워해서 놀이기구도 안 타고 물도 싫어하잖아. 네가 엄마 닮아서 그래. 근데 00아. 그런 거 잘 못해도 괜찮아. 엄마 봐봐. 사는데 아무 문제없어. 그리고 너는 엄마랑 지금부터 연습하면 너는 엄마보다 훨씬 나아질 거야. 엄마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거든"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 말 밖에는 아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사실 그랬다. 아들은 유독 나를 많이 닮았다. 그게 너무 좋을 때도 있었으나 너무 싫을 때도 있었다. 나처럼 불안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아들이 태어난 후 3년을 그렇게 공을 들여 애착을 잘 형성해도 아들의 불안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학교를 들어가서 말을 하지 않고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고, 위험할 것 같은 놀이는 절대 하지 않고,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아들을 보며 딱 내 모습 같았다. 그래서 참 많이 속상했다. 어쩌면 사랑하는 내 아들의 불안도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없구나 싶어서..
처음엔 날 닮은 아들을 고쳐 보고 싶었다. 그래서 참 아등바등한 적도 많고 뜻대로 되지 않아서 또 아들이 너무 걱정되어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남편은 날 닮은 아들을 참 좋아했다. "지금은 좀 느려도 나중에 크면 괜찮아질 거야. 자기도 잘 살고 있잖아. 나는 우리 아들 좋아."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래! 좀 불안하면 뭐 어때? 나도 지금 이렇게 잘 사는데 뭐. 아들도 나중에 크면 잘 살겠지"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 아들을 좀 더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을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불안한 내 마음을 붙잡는 것이었다. 내 눈빛, 말투에서 묻어 나오는 아들을 향한 걱정스러움과 불안감이 아들을 더 힘들게 했으리라. 그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어쩌면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 너는 괜찮은 아이야.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너는 엄마 아들이니까"라는 확신이 아닐까 싶었다. 나도 어릴 때 그 소리가 참 듣고 싶었으니까. 어린 시절 주변에 있는 어른 중 어느 누구도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여자라서 부족하고 머리도 똑똑하지 못한 어딘가 모지란 아이 같다는 어른들의 눈빛과 차별이 나를 더 쪼그라들게 했었으니. 그래서 언젠가 부터 아들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기로 했다.
예민하고 불안한 아이에게 비교는 치명적이다. 불안이 높은 아이들은 긴장 때문에 수행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때로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뒤쳐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차이를 이미 스스로가 너무 잘 인지한다. 그래서 누가 비교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가장 비참하고 괴롭다. 그러니 그런 아이들을 비교하고 차별해서 키운다면 그야말로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과 같다.
비교나 비난으로 아이를 자극시키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절대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항상 알려주고 격려해줘서 자신의 속도로 자신감 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때론 어떤 면에서 부모는 스스로 의지적으로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들은 "00 이는 엄마보다 훨씬 낫네. 엄마는 너만 할 때 이런 것도 못했어"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그 말을 해주면 " 정말? 엄마도 그랬어요? 나만 그런 거 아니야?"라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나는 " 당연하지.. 엄마는 너보다 더 심했어."라고 말해 주었다. 나의 말 안에는 자신은 엄마의 아들이라는 동질감과 동시에 자신도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들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끔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비슷한 사람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아들을 키우면서 나는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한국문화에서 숨쉬듯이 비교를 당하고 살아온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였지만 그렇게 해야 아들의 성장이 내 눈에 보였다. 아들을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늘 절망적이고 한숨만 나왔다. 그런 나의 절망과 한숨은 아이에게 독이나 마찬가지 였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멈추고 아들을 바라보니, 아들은 언제나 조금씩 조금씩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음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 그를 격려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도 아들은 또래에 비해 많은 것이 뒤쳐진다. 하지만 이젠 예전만큼 불안하거나 걱정스럽지는 않아졌다. 아들이 지금처럼 자신의 속도대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란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씨앗은 언젠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테니까. 그 시기가 다른 또래 아이들과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한 꽃과 열매가 아니더라도 이젠 별로 개의치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아들을 키우면서 나는 습관적인 비교로 만들어진 불안을 다스려야 했다. 그것이 가장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였으니까.
나는 불안한 엄마였다. 아니 나는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육아를 하면서 더 공부하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냥 되는대로 내 맘이 내키는 데로 하지는 않았다. 혹시 나의 실수와 잘못으로 아이들이 잘못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불안은 어쩌면 내가 자녀교육과 심리학 공부를 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완벽하진 못해도 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불안이 다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불안은 늘 나를 예비하고 준비되도록 했기 때문에.
그러나 나의 불안은 분명히 아이에게 독이 될 때도 있었다. 아이들의 작은 실수와 잘못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에 아이들도 많이 불안해 했을 테니. 그래서 나는 그런 행동은 고쳐나가야 했다. 그런 행동을 고치기 위해서 스스로 나의 불안을 마주해서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불안한 아들을 키우면서 가장 많이 나의 불안을 가장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마음을 들여다 보며서 내 생각을 바꿔야 했고, 또 때로는 아이들 앞에서 대담한 척 별일 아닌척 연기를 해가며 그렇게 불안을 다스렸다. 그렇게 지난 11년간 나는 아들을 키우고 아들은 나를 키우며 함께 성장한 것 같다. 가끔 흔들리고 쓰러질 때도 있었지만 아직 둘 다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음에 너무 감사하다. 뿌리만 뽑히지 않는다면 언제가는 자라니까. 그리고 나의 이 경험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 가운데 있는 누군가에겐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 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