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기분이 오묘했다. 온몸이 쑤시는 기분. 몸을 추스리기 위해 옷을 입으려 하는데, 팔이 옷깃에 닿을 때마다 몸의 곳곳이 찌릿하면서 소름이 돋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발끝이 시렸다. 에어컨의 온도는 적당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꼬이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이불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타이베이(台北)부터 타이중(台中), 그리고 가오슝(高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지난날을 떠올렸다. 여행의 계획이 꼭 맞아떨어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완료된 부분을 체크해 나가며 나름의 재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가 하면 강박적으로 목표들을 모조리 해내겠다,라는 의지도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계획들을 이루어 나가면서 어쩐지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으쓱거리는 기분도 들었다.
몇 시 몇 분 단위로 쪼개어 맛집, 관광지의 동선까지도 철저히 계획한 이번 여행을 되돌아보며 꽤 완벽했다고 느꼈다. 새벽 5시부터 급하게 짐도 싸고,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투어에도 참여하면서 계획적인 성향이 곧 여행지에서 빛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투어가 끝나고 보니 휴대전화에 찍힌 만보기에는 총 2만 걸음을 걸었다고 떠 있었다. 혹여나 이런 과정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걸까. 보통 여행을 다녀와서 여독이 풀리지 않아 고생하긴 했어도, 이렇게 여행지에서 아픈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아픈 건 순전히 무리한 계획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몸이 아프니 더욱더 밥을 먹어야 한다는 핑계를 댔으나 사실은 이미 지불한 조식 비용이 아까웠던 것이다. 친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게 죽을 떠다 주었다. 가방에서 해열제 한 알을 꺼내 주기도 했다. 나 대신 이것저것 챙겨 온 친구 덕분에 쓰러질 듯한 몸을 겨우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아 친구에게 매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약을 먹자마자 몸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꽤 흐르자 몸살 기운은 줄어들었다. 이제 다시 여행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타이베이로 올라가 숙소를 체크인하고 진천미 식당(金千米餐廳) 방문, 그리고 까르푸(Carrefour) 쇼핑을 할 차례였다. 이제와 건강을 이유로 이 일정을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약 기운이 떨어져서였을까. 타이베이의 숙소에 체크인을 한 즉시 몸이 이상해지는 느낌을 감지했다. 다시 해열제를 먹었다. 여행 마지막 날 계획을 망칠 수는 없지. 나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진천미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온몸이 뜨겁게 타오르는 걸 느꼈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을 입에 넣었지만, 어떤 맛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는 감탄 일색이었으나 나는 전혀 맛을 느낄 수 없어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했다. 다시금 오한이 느껴졌다. 떨려오는 손을 붙잡고 뜨끈한 국물을 마셨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는데도 국물이 미지근했다. 과연 까르푸에서 쇼핑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비틀거리며 식당 밖으로 나왔다. 무언가 지탱할 것이 없으면 제자리에 서있는 것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억지로 무언가를 밀어붙이기엔 역부족이라는 판단이었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친구가 빌려준 외투를 껴입고 이불속으로 쑥 들어갔다. 해열제를 더 먹었다. 나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친구가 무언가를 중얼 대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친구가 돌아왔다. 호텔 직원에게 근처 병원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왔다고 했다.
순간 나는 망설여졌다. 이 낯선 나라에서 병원이라니…. 나는 두렵기도 하고 정확한 판단이 쉽지 않기도 해서 이불속을 더 파고들었다. 해외에서 병원비 폭탄을 맞거나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오히려 힘들었다는 블로그 글이, 문득 떠올랐다. 더불어 친구에게 폐를 끼치기도 싫었다. 조금만 더 숙소에 있겠다며 병원 방문을 꾸물댔다. 그러자 친구는 이 마음을 읽었는지 나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우리는 이미 여행자 보험도 있고 번역기가 있으니 아픈 증상을 말하는 것도 잘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그래도 낯섦의 세상에서 낯선 침상에 누워있을 생각을 하니 무척 두려워졌다. 만약 그렇게 되면 대만에서 쌓았던 좋은 기억이 모조리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렇듯 병원 문제로 옥신각신 씨름을 하다가 어느덧 몸의 열기가 서서히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해열제의 약효가 이제와 제대로 든 모양이었다. 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기운도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숨쉬기가 버거웠는데, 이제는 비교적 고르게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한결 가벼워진 상태로 접어들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를 위한다는 마음을 숨긴 채, 친구를 배려한답시고 포장했으나 솔직히 나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고열과 오한이 나도 한사코 병원을 마다했던 그때를 돌이키자니, 대체 누구를 위한 결정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병원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던 행동이, 나와 친구에게 과연 좋은 일이었을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또다시 스멀스멀 아픈 기운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갔다. 수액을 한 대 맞고 나니 아팠던 몸이 거짓말처럼 회복되고 있었다.
‘그래, 수액 하나로 이렇게 돌아올 거면서…….’
행복해지자고 다짐했던 여행의 마무리가 약간의 고집으로 조금은 이상해진 것만 같아 씁쓸했다. 뭐 그렇더라도 이것 역시 여행 중에 겪을 수 있는, 색다른 해프닝 아니겠는가.
우리는 대부분 낯선 환경에서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꺼린다. 나 역시 그런 축에 속했다. 내가 세운 여행 계획에 따르면 나는 목표 달성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일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다 착각이었다. 나는 지나치리만큼 완벽을 내세우는 계획 앞에서,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때로는 느슨해질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걸. 맥락 없는 병이 갑작스레 끼어들지 않도록.
다음에는 꼭 용기를 내어 병원을 가보고 싶다. 물론 해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