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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션

by RNJ
캡션. 2023


아빠가 되자 이름부터 사라졌다.


"동백이 아빠!" "동백이 아버님!" "동백이 아빠 삼춘?" "아저씨?" "총각? 아니네?"


오래된 친구를 제외하면 이제 누구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다. 아빠가 된 다음부턴 나로서 맺어진 관계보다 우리 아들로 인하여 이어진 관계가 더욱 많아졌기 때문인데 요즘은 아이도 엄마를 따라 나를 "자기야"라고 부른다. 아이는 귀엽지만 아빠는 혼란스럽다. 나에게도 이름이 있었는데, 그런데 나조차 나를 무엇이라 부르고 있는가?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동백이 아빠입니다."




어린 시절, 한글세대인 나는 전시회를 갈 때마다 작품들이 이름이 죄다 똑같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것도 '무제' 저것도 '무제', 이건 無題, 그건 Untitled. 쥐꼬리 만한 캡션 속의 유일한 차이는 그림을 어디에 무엇으로 그렸는지 뿐이었다. 피와 땀으로 그린, 공들인 작품에 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전시회에서 지인들에게 내가 그린 그림을 해설할 때 그 이유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같은 그림을 앞에 두고 매번 다른 해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조차도 이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그림을 그린 이유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왜곡되어 버렸음이 분명했다. 놀라운 사실은 해설을 들은 모든 지인들이 "아~"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만족스러운 제스처(겉으로만 그랬을 수도 있다만)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명작가의 그림이 아닌 지인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힘써 왔을 테니.


"캡션을 너무 작게 만들어놔서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니깐요?"


도립 미술관에서 열린 같은 전시를 다른 날에 보고 온 직장 동료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운 그림의 우측 하단에는 좌우 폭이 7cm도 되지 않는, 심지어 어두운 전시장에 검은색으로 프린팅 한 작은 캡션이 붙어 있었다. 내가 방문한 날에도 캡션 앞에선 나이 지긋해 보이는 관람객들이 가방에서 다초점 안경을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 작품만을 온전히 즐기라는 배려라 해도 믿겠다만 일방적으로 강요된 불폄함이라 해도 반박할 순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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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구실을 참고하여 전시회의 캡션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채웠다. 시력과 모국어에 상관없이 작품을 가장 잘 해설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림이나 픽토그램 같은 이미지라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출력한 스케치북에 내가 사용한 도구를 하나씩 풀로 붙였다. 서명 대신 사용한 도장과 연필, 그리고 1,500원짜리 다이소 만년필을. 제목의 자리에는 연필로 화산섬 제주를 그려 넣었다. 캡션은 섬의 윤곽을 형성하는 그림과 시의 도열 사이, 벽의 중앙에서 균형을 잡으며 주연이자 조연이 되었다.


"인생을 컬러지만 흑백이 더 현실적이다."


함께 작업한 작가들과 통일성을 갖추느라 캡션 몇 장을 구색용으로 발라두었다만, 그림을 보는 이들이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기를 바랐다. 빔 벤더스의 말했듯이 메시지는 흑과 백의 경계, 단순한 선으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결과물이 흐릿한 과거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고 지금은 얼마든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아이와의 관계로 "동백이 아빠"로 새로이 명명되었듯이 말이다.


아이는 가끔 엄마를 아빠로, 아빠를 엄마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의 눈빛에서 숨겨질 수 없는 진심 어린 메시지를 읽어낸다. 어쩌면 이름은 허울뿐인 약속,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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