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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육아시 2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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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Apr 02. 2024

횡단보도


 아기 엄마와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의 첫 데이트도 올레길이었고, 아이가 생긴 이후에도 손을 잡고 부지런히 걸어 다녔다. 배가 커질수록 아기 엄마의 발걸음이 느려졌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 가족은 횡단보도의 마지막 통과자가 되어있었다. 보행 신호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많은 차가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다. 조증을 운전 실력이라 자부하는 시대는 언제쯤 끝이 날까?


 집에서 한 블록만 나가면 왕복 7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널찍한 횡단보도의 길이는 대략 25m 정도 된다. 보행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33초. 임산부와 노인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괴로운 레이스를 펼쳐야 한다. 우리는 항상 5초 정도를 남기거나, 5초를 초과한 채 건너편에 도달했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횡단보도에서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노인을 만나면 자꾸 뒤에서 따라 걷게 된다. 이동의 속도가 느려질 때 우리가 약자가 되어있음을, 잠시라도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페에서 잡무를 처리하는 나를 두고 아기와 엄마가 먼저 집으로 총총총 출발했다. 나는 사거리의 한편에 서서 아기 엄마가 길을 두 번 건너는 모습을 지켜봤다. 부지런히 걸어도 쉽게 건너편에 도달할 수 없었다. 어둠이 깔리던 퇴근길 횡단보도는 우회전 차량에게 거침없이 침범당하고 있었다. 초록불의 불안한 점멸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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