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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Jan 22. 2022

폭설에 설레이고 싶은 나이이지만

눈은 멀리서 보고만 싶다

 아이 키우는 엄마답지 않게 일기예보를 거의 확인하지 않는다. 한 번 안 하기 시작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이 어릴 때 미세먼지 예보에 집착하며 살았던 전적이 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꾸준히 예보를 내려놓는 연습을 한 결과이다.


또 다른 이유는 꽤 정확한 미세먼지 예보와는 달리 일기예보는 안 맞는 날이 더 많기 때문이다. ‘봐도 어차피 안 맞아.’라는 생각이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아이가 좀 더 크면서 천식과 기관지염에 덜 예민해지기도 했다. 어제보다 기온이 더욱 강하된다는 예고를 보아도 더 끼어 입힐 게 없기도 하다. 장갑도 안 낀대고, 모자도 안 쓴단다. 옷은 더 이상 껴 입지 않겠단다.(나 닮아 그런 거니 어쩔 수 없다.)


비가 온다거나, 눈이 온다고 하면 우산을 챙겨줘야 하겠지만 아침부터 오는 것도 아닌데 미리 챙겨줄 필요도 없다. 요즘은 학교에서 비치해 둔 우산을 빌려 쓰고 다음 날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된다. 아이가 그 우산의 이름이 '양산심우산' 이라고 입술을 벌렸다 오므렸다 귀엽게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아마 '양심우산'인 걸로 추측된다. 아주 많이 오지 않는 한 우산을 드는 게 더 힘들다고 그냥 비를 맞아 버리는 건 날 꼭 닮은 모습이라 뭐라 못 하겠다. (사실 비보다 우산이 무거운 건 인정해 주자.)





 이번 주는 눈 예보가 있었나 보다. 아침부터 행정안전부의 안전 안내 문자가 대설예비특보를 알려 주었다. 문자를 잘 보지 않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출근했다. 오전에 한국도로공사의 안전 안내 문자로 직원들의 전화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도 그 문자를 받자마자 전화가 왔다. "엄마! 난 눈이 너무 좋은데, 기다렸는데, 혹시 위험한 거야?"


점심을 먹는 동안 식당 창문 밖으로 눈이 시작되는 것이 보였다. 딱 봐도 바닥에 쌓여 사라지지 않겠다는 몸짓으로 내려오고 있다. 나와 보니 큰 결심한 듯 큼직한 눈송이가 소복소복 바닥에 앉는다. 두 가지 표정이 보인다. 눈이 와서 걱정스러운 표정과 신나는 표정 두 가지의 직원들로 나누어졌다. 스노타이어를 교체했는지 서로의 안부도 묻는다. 그때 한 직원이 말한다.


 "눈 오는 거 싫어하면 나이 든 거라던데! "




눈을 맞으며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눈송이는 점점 더 커지고 많아진다. 눈꺼풀이 시리고 머리가 축축한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달랐겠지만 머릿속 생각은 비슷했을 것이다. "오늘 제설작업 조는, 몇 조지?"


다음 날 아침이 제일 걱정이다. 평소보다 일찍 나서더라도 차는 더 막힐 것이다. 이미 직원들은 주차장 눈을 치우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게으른 이 삶이 이럴 때 싫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나 보다. 직원이 다시 말한다. "빨리 눈 보고 좋은 척하세요! 눈 보고 안 좋아하면 나이 든 거래요!"


일본영화처럼 팔을 벌리고 눈을 맞으며 "내리는 눈 만큼 널 사랑해!"라고 웃기려고 애쓰는 직원 앞에서도 억지웃음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퇴근길은 얼마나 막힐까. 친정엄마의 아이 픽업이 힘들 테니 아이의 피아노 수업은 취소해야겠다. 남편 차가 좋은 차였으면 남편의 퇴근길 걱정은 덜 해도 됐으려나. 그래도 눈이 오니 민원인은 덜 오겠지? 경로당 회장님 오시기로 했는데 미끄러우시면 어떡하지. 머릿속이 계속해서 복잡했다.




 저녁에는 친구와 약속이 되어있었다. 제대로 눈 오는 날 약속이라니 적절하다.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낮에 종종 가던 음식점에 갔다. 맛도 있는데 손님이 늘 없어서 갈 때마다 코로나 걱정은 덜 하던 곳이다.


밤에는 처음이었다. 그 집은 음악과 조명과 직원분 팔뚝의 문신 스타일까지 바뀌어 완전히 다른 가게였다. 조용한 카페 분위기가 아닌, 완전한 펍 분위기. 게다가 다른 손님도 있... 네... . 어쨌든 이 분위기는 눈이랑 딱이잖아. 파스타 먹으러 갔는데 갑자기 술집에 갔다는 기분이 들었다. 메뉴판의 메인 메뉴나 브런치 메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안주로 보이는 사이드 디쉬만 눈에 띄어 다음에 꼭 여기 술 마시러 다시 오자고 스스로 약속했다. 그렇게 방역지침에 따른 9시까지 두 시간만은 오롯이 눈에 부합하는 맛과 공기를 즐겼다. 갑자기 신이 나서 눈이 다시 좋아졌다. 혹시 나 아직 안 늙은 건가?




아이는 역시나 그날 저녁 어둠과 추위를 뚫고 아파트 앞 눈 더미를 뒹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남편이 찍은 동영상과 사진이 윙윙 거리며 도착했다. 영상을 보며 두꺼운 패딩이 하나밖에 없는데 저걸 오늘 밤에 빨면 내일까지 마르려나, 그냥 하루쯤은 덜 두꺼운 패딩을 입혀 학교에 보내도 되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눈과 함께 걱정만 계속하다니, 나이 든 게 확실하다.


예상대로 눈 오는 데 퇴근을 잘 했냐는 엄마의 카톡과, 오늘은 전 사무실에 업무 인계 가지 말라는 아빠의 문자도 이어졌다. 엄마 아빠는 나보다 나이가 더욱 많으시니, 눈 올 때 걱정이 몇 배로 많으시겠지. 눈처럼 하얀 거짓말로 답장을 보냈다. “네! 집에 일찍 왔어요!”





그리고 며칠 후, 보건소로부터 문자를 받는다. 코로나19 확진자 관련 단순 검사 대상자로 분류되어 검사를 받으라는 문자였다. 확진자와의 접촉 장소는 바로 그 눈 내리던 날 낭만을 즐기던 그 음식점이다. 꼴랑 그 두 시간 만의 따듯한 눈의 정서마저 서늘하게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나이 든 거 숨겨보려고, 대설주의보에 설레이고 싶은 욕심이 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젊어지기는 글렀다. 눈 보고 그저 기뻐하기는 나에게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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