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지수 Dec 18. 2023

이번생, 다시는 당신과 마주 앉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란 걸 알지만 그래도 써 봅니다. 옛사랑, 당신께.


옛사랑, 당신께.     



잘 지내고 계시나요. 편지는 참 오랜만입니다.

어차피 써봐야 어떤 답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당신 얘기는 다만 일기처럼 쓰곤 했습니다.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를 쓰는 건 꽤 서글픈 일이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편지를 좀 쓰고 싶어요.

음ᆢ정확하게는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번 생에 다시는 당신과 마주 앉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리 편지를 씁니다.

부치지는 못할 편지라 결국엔 나 혼자 떠드는 글이 되겠지만, 그래도 그게 당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딘가 꽤 따뜻한 기분이 들거든요.

  

이젠 서글픈 마음보다 따듯한 기분이 더 먼저 드는 게.. 제가 당신 없는 사이, 고새 좀 컸나봅니다.









요즘 당신 생각이 부쩍 늘었어요.


참 이상하죠.

홀로 길을 걷다 문득,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 갑자기.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많이 남았나 봐요.

역시 이 계절엔 어쩔 도리가 없어집니다. 또 당신을 앓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정보화 시대가 참 미워요,

당신께 근사한 애인이 생겼다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당신 생각을 하는 것조차 무언가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 듭니다.

물론 이 글도 그렇고요.



그래서 오늘의 당신 말고요,  그 옛날 참 소중했던, 기억 속 첫사랑에게 편지를 쓰려고요.

그러니 우연히 이 글을 보게 되어도 그냥 넘겨주셔요. 오늘의 당신은 단 한 조각도 욕심내지 않습니다.

여전히 당신이 아니면 제 얘길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래요.



미련하고 이기적인 거 알지만.. 이 정도는 하고 싶어요.

그래야 나도 좀 살지 않겠어요.



당신, 그러니 꼭 지나가요.

당신께 쓰는 편지지만 당신만은 보시지 않길 바랍니다.     







그간 제게는 또 참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당신과 만나던 때, 오래 연락을 않던 친아버지가 쓰러지셨던 거 기억하나요?


저는 아빠의 법적 가족이 아니라서 병원 면회가 안 됐습니다.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때라 병원에서는 돌아가시면 부고 소식만 알려주겠다 하더라고요. 정말이지 코로나가 참 미웠어요. 게다가 재난 문자가 뜰 때마다 아빠의 부고일까 봐


이런 표현 상투적이라 좋아하지 않지만,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 아빠를 미워하던 지난 20년의 시간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요.

물론 용서하기 어려운 아빠였지만, 그래도 아빠는 아빠였던터라 마음이 많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런데 작년 가을, 3년 만에 아빠가 깨어나셨어요.

부고 소식만을 전할 것 같던 병원 전화로 아주 기적 같은 소식을 들은 거 있죠?

아주 못되게 끊은 옛날의 그 전화가 아빠와 저의 마지막이 되어버릴까 내내 후회했었는데, 참 다행이었어요.


저는 한달음에 아빠께 갔습니다. 그런데, 제 눈앞에 그분은 더 이상 제 기억 속 그분이 아니셨어요.

정말 참담했습니다. 정확한 아빠의 병명은 모르지만, 간병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상태셨어요.


아.. 이걸 ‘산다’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셨죠. 왼쪽 신체는 마비가 와서 아예 움직이지 못하시고, 목소리도 내지 못하시고, 온몸이 앙상한데 팔다리는 퉁퉁 부어계셨어요. 게다가 정신도 온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혼할 때 분명 별장, 주택, 아무튼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아빠께서 가지셨는데.. 저 크는 동안 양육비 한 번 준 적 없으셨는데 단칸방 하나밖에 남지 않으셨더라고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냥 말없이 아빠의 손을 잡아 드렸어요.


제 기억 속에선 늘 강하고 언제나 매몰찼던 그 아빠가, 우시더라고요. 엉엉 우시더라고요. 그렇게 저도 퉁퉁 부은 아빠의 손을 잡고 한참을 함께 울었습니다. 어떤 끔찍한 일들이 있었는지 가늠도 안 갈 만큼 열악한 방에서 한참동안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심장이 덜컥 아래로 추락했다는 표현이 더는 추상의 개념이 아님을 여실히 느꼈어요. 아, 심장이 정말 이렇게 되는구나. 이게 감각으로 형상되는 표현이구나.


더는 아빠로 인해 흘릴 눈물 같은 거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아빠와 손을 맞잡고 한참을 함께 우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점점 괜찮아지는 거 있죠? 분명 눈물은 쏟아지는데 어쩐지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아빠는 아무 말씀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저 함께 울 수 밖에 없었지만 저는 들을 수 있었어요.

저를 반기는 눈에서, 미안한 손짓에서, 부끄러운 표정에서, 그리고 차오르는 눈물 속에서 계속 들을 수 있었어요.


미안했다고, 그간 아빠가 정말 미안했다고 말이에요.


아빠를 보러 가는 길 내내 애진작에 한 그 용서를 다시금 되새김질하며 사실은 용서할 수 없고, 사실은 용서하면 안 된다고 잠깐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마주한 순간 이미 그런 생각 따위는 타버리고 없어졌어요.


다만 사랑만이 마음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비록 제게 부모 노릇을 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자식 노릇하고 살려고요.

가시는 날까지 종종 들릴 테니까 너무 쓸쓸히 계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습니다.



그 후로 한 계절에 한 번씩은 꼭 찾아 뵙고 있어요. 게다가 매주 전화도 드리고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시지만, 간병인분께서 아빠가 제 목소리에 아주 활짝 웃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친구들과 만났다거나, 주말에 강원도에 다녀왔다거나 하는 일상들을 얘기 해드려요.

웃고 계시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재잘재잘 일곱 살처럼 떠들어 드립니다.







당신, 제 꿈이 뭐였는지 기억해요? 


저는 언제나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아빠를 만나고 온 후, 저는 그토록 바라던 좋은 어른으로, 나은 어른으로, 또 꽤 씩씩한 어른으로 잘 큰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서도 사랑도 다 되는 그런 멋진 어른으로요.

그렇게 낳아 주셨나봐요, 제 아빠가요.



다만 가난에 허덕이며 치열하던 그때의 저에게 양해를 좀 구하긴 했어요.

죽을 만큼 힘들게 살았고 그럴 때마다 아빠는 엄마랑 저를 외면했었는데 너무 쉽게 용서한 것도 모자라 자식 노릇까지 한다고 생각하면 아마 그때의 저는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아요.


누군가는 제게, 아무리 너를 이해하려 해도 조금의 이해도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아빠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요.


저라고 어디 쉬웠겠어요, 그런데 20년 미워했으면 많이 한 거 같아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안고 사는 건 참 괴로운 일이에요.

게다가 사실은 엄청 사랑하는 대상을 미워해야 일은 더 그렇고요.


그래서 미워하기보다 사랑하기를 택했습니다.



당신은 제게 항상 그러셨어요.

제가 남들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것만큼 저도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라고요.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지 말라는 당부였죠.


하지만 한 평생 듬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로 살다 보니 기대는 게 아직도 어려워요.

그리 긴 생은 아니었지만  인생 중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당신을 잃고 나서는 더 그래요.

밤새 끅끅대며 울어도 다음 날 활짝 웃으며 집 밖을 나섭니다.


아직도 그렇게 살아요.

아빠를 보고 온 후로 꽤 오랫동안 먹먹한 마음으로 지냈는데 또 혼자 끙끙댔네요.

모르겠어요, 왜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는지요.



그런데 이제는 좀 바꿔야 할 것도 같아요. 저도 이제는 힘에 부친 것 같아요.

아빠를 뵙고 온 두 달 후, 엄마가 암 선고를 받으셨거든요.


참 오랜만에 죽고 싶다는 약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3편 말미에 언급한, 제가 가끔씩 그리워 한다는 그 옛사랑에게 편지를 써봤습니다.

편지는 다음 글에 이어서 더 적어 올릴 예정입니다.


거짓 한 줄 없는 글이고

왜곡 하나 포함되지 않은 편지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브런치북의 주제 의식과 가장 부합하는 글이지 싶습니다. 작가를 꿈꾸지 않았다면 블로그에 나만보기로 적었을, 저의 심연 속 얘기입니다.




이전 03화 연애하기 XX 귀찮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