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24편)
오랜 벗들과 만나 식사를 하며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원래는 저녁을 함께 하려 했는데 벗 한 명에게 일이 생겨 점심으로 바꾸었다. 벗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시간이 아쉬울 뿐 얘깃거리는 무궁무진. 특히 재미있던 추억 나눔을 떠올리며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았다.
양남네거리를 지나며 우리 집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산길로 접어드는데, 저 멀리 오른쪽 길섶에 까투리(암꿩) 한 마리가 엉거주춤 서 있는 게 보였다. 첫눈에도 도로를 건너가려는 것임을 짐작케 하는 그런 자세였다. 본능적으로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다.
이 길을 가다 보면 야생동물을 가끔씩 만난다. 다람쥐, 산토끼, 노루, 고라니, 너구리 …. 이런 길짐승 말고 날짐승도 만나니 그중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길짐승은 고라니요, 날짐승은 꿩이다.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나다 보니 어느 지점에 가면 고라니 아니면 꿩이 나타날 때가 됐지 하는데 오늘도 역시 그랬다. 먼저 암꿩인 까투리가 보였는데 잠시 후면 까투리가 지나갈 게고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꿩은 도로 위를 날아 뛰어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잽싼 걸음으로 지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움직이려 하지 않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빵 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그러자 이쪽을 한 번 보는가 하더니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거였다. 그래서 출발하려고 가속기를 밟으려는데 …
아 그만 올렸던 발을 내려야 했다. 꼬마들이, 새끼들이, 꺼병이(꿩 새끼)들이 줄이어 나오는 게 아닌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모두 여덟 마리였다. 어릴 때 예쁘지 않은 동물이 있으랴마는 마치 갓 태어나 첫걸음마를 떼는 병아리들처럼.
한 줄로 늘어서서 나란히 걸어가는 꺼병이(꿩의 어린 새끼)들의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저희들 딴에도 무서운 느낌이 들었는지 잽싸게 발 놀리는 모양이나 내 보기엔 속도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건너편을 보니 어미 까투리가 꺼병이 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지 아닌가. 애초엔 어미 까투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차가 오지 않을 때를 골라 도로를 건너가려 했으리라.
그런데 내 차가 왔고. 그냥 지나쳐가기를 바랐는데 섰고. 어미의 뒤에는 꺼병이들이 딸려 있었고. 도로를 건널까 말까 판단하기 어려웠을 때 클랙슨이 울렸고. 어쩔 수 없이 날아야 했지만 새끼들이 걱정돼 바로 도로 건너편에서 마음 졸이며 이쪽을 바라보았을 터.
순간적으로 비상스위치를 눌리면서 뒷거울을 보았다.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제발 꼬마들이 무사히 지나갈 때까지 맞은편에서 차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정말 간절히...
오르막길은 직선도로라 뒤에서 앞을 볼 수 있지만 반대쪽 내리막길은 바로 굽이길이라 앞을 볼 수 없으니, 대부분의 운전자라면 갑작스레 나타난 야생동물을 위해 브레이크 밟기보다는 차와 사람 다치지 않기 위해 그냥 치고 나갈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원래 차 통행이 적은 덕인지 기도의 덕인지, 다행히 꺼병이들이 무사히 건너자마자 트럭 한 대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맞은편을 보니 어미와 새끼 아홉 마리는 이미 길섶으로 다 들어가 선지 보이지 않았다.
2021년 봄, 신문과 TV를 달궜던 ‘구미 3세 여아 사망사건’. 친모라고 알려진 김모 씨가 실은 언니이고, 외조모로 알려진 석모 씨가 진짜 엄마라는 얘기부터, 그럼 김모 씨가 낳은 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의문까지.
처음 뉴스가 떴을 때 사람들은 기자들이 뉴스 만들기 위해 과장했다고 여겼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으니까. 그러나 이제 다들 안다, 얼마나 인간이 잔인할 수 있는 가를. 가장 비참한 죽음은 굶어주는 일. 그 어린아이는 그렇게 하늘로 갔다.
집에 오는 길에 만난 꿩 가족, 특히 어미 까투리는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성인들로부터 좋은 말 들은 적도 없다. 하찮은, 정말 하찮은 미물이지만 제 새끼가 혹 위험에 처할까 안절부절못하며 길만 주시하던 그 간절한 눈길, 우리 인간이 그 하찮은 미물에게조차 못 미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그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 삽입된 그림 두 장은 하도 긴장된 순간이라 사진을 찍지 못해 아는 이에게 얘기해 줬더니 그려 줌.
*. 오늘 글은 '목우씨의 일기장(2023. 4. 16)'을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