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자동이체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50편)

* 사랑의 자동이체 *



모 대학 경제과 1학년 [경제학 개론] 수업시간입니다. 하도 교수의 나른한 목소리에 다들 졸음을 참고 있는데 갑자기 ‘띵! 똥!’ 하는 소리. 그 순간 김수호 군은 화들짝 놀라 호주머니를 움켜쥐며 주변을 슬쩍 훑어봅니다. 다행히 자기 폰에서 울렸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맞다, 오늘이 26일이구나.’

강의실 들어올 때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을 걸 깜빡했습니다. 그보다 이 시간에 보낼 사람 없어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야죠. 허나 26일이라면 다릅니다. 이 날엔 용돈이 입금되기 때문이지요.


용돈? 웬 용돈? 아빠 엄마가 주는 용돈? 아닙니다. 높은 곳에 계신 할아버지가 보내는 용돈입니다. 정확히 26일이면 10만 원이 입금됩니다. 수호가 태어나면서부터 만들어진 계좌로 들어왔다고 하니 족히 20년은 된 셈입니다. 생활에 필요한 용돈은 따로 엄마가 주니 그동안 제법 쌓였습니다.

할아버지, 정확히는 외할아버지를 뵌 지 10년이 더 넘었군요. 어린이집 다닐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지라 제대로 얼굴이 떠오르지 않지만. 다만 매달 26일이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자동이체로 하여 할아버지를 잠시 떠올립니다. 엄마 얘기로는 여동생 민지와 사촌 누나 둘에게도 같은 날 같은 액수가 날아간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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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입니다. 프랑스 파리 행 출국장에서 박현선 양은 시계를 봅니다. 이제 잠시 후면 비행기가 이륙하고 내일 아침이면 꿈에 그리던 곳에 도착합니다. 현선이는 미대를 졸업한 뒤 좀 더 나은 그림 공부를 하려 프랑스로 가고 싶었으나 뻔한 가정 형편에 말을 못 꺼냈습니다.

대신 올 초에 두 살 아래인 동생 민선이가 엄마에게 말했던가 봅니다. 그 뒤 아무 말 없어 완전히 포기했는데 두어 달 전에 엄마가 조용히 불렀습니다.

“우리 집이 네 고모네처럼 잘 살면 이런저런 걱정 안 하고 공부만 신경 쓰면 될 텐데... 미안하다.”


고모네는 밸브 생산 중소기업을 하는데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잘 되는가 봅니다. 현선이가 재빨리 엄마 말을 받았습니다.

“나는 엄마 아빠 원망 안 해. 우리 둘을 위해 지금도 희생하고 있잖아. 그러니 더 이상 안 도와줘도 돼. 내가 알바를 해서...”

“알바를 해서라도 그렇게 꼭 가고 싶니?”

“응, 하지만 우리 형편이...”

“일 년치 등록금만 해주면 다음 해엔 너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겠다고 했지?”

“응, 하지만 우리...”




다음은 엄마가 현선이의 말을 끊으며 들려준 얘기입니다.

할아버지가 우리 자매 둘과 고종사촌 동생 둘에게 매월 십만 원씩 보낸 걸 그대로 저축했다는 얘기. 생활비는 어렵겠지만 일 년 유학 등록금은 된다는 말. 현선이는 출국장으로 들어가면서 이제는 가물가물한 초등학교 때 헤어진 할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수호 부모와 현선이 부모가 함께 어머니인 이필순 여사를 만난 건 그즈음이었습니다. 먼저 말 꺼낸 사람은 딸 지수입니다.

“엄마, 왜 우릴 오라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아님 심심해서?”

“이렇게라도 해야 너거들 얼굴이라도 볼 거 아냐.”

“아이구 참, 못 본 지 얼마 된다구. 저번 달에도 보았잖아. 고작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 사이에 지수의 오빠인 아들 준모가 끼어듭니다.

“어머니, 정말 무슨 일로 우릴 불렀어요?”

“그래 얘기해야지...” 하곤 이 여사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너희 애들에게 날마다 보내는 용돈이 이제 다 떨어져 간다. 네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넣어둔 돈이...”




잠시 이 여사의 머릿속으로 폐암 앓던 남편이 떠나기 일주일 전에 주고받던 말이 떠오릅니다.

“여보, 아무래도 내가 얼마 버티지 못하겠소. 내가 죽고 나더라도 손자 손녀들이 나를 기억했으면 좋겠소. 꼭 들어주시오...”

이곳저곳 강의 나가며 받은 강사료와 원고료 받아 이 여사 몰래 모아둔 돈이라며 저금통장을 내밉니다. 세상에! 돈 좀 모아둔 것 같아 필요할 때마다 돈 있느냐 물었을 때 없다고 하던 양반이 언제 이렇게 많이 모았나 눈이 둥그레집니다.


“당신이 갖고 있다가 애들 한 명에게 매월 10만 원씩 보내주시오. 이왕이면 자동이체해 놓으면 당신도 편할 게고... 이체돼 오는 순간 휴대폰을 보면 내 이름 석자가 뜰 게 아니오. 그때만이라도 나를 떠올릴 게고. 남보다 일찍 가면서 아이들에게 줄 조그만 선물이라오.”




그렇게 손주들에게 매월 26일 보낸 돈이 한 달에 40만 원, 일 년에 480만 원, 제법 목돈 될 만한 큰돈이었건만 이제 200만 원도 채 남지 않았으니...

“아, 아쉽네. 우리 애들 이제 용돈은 끝났나. 엄마가 가진 돈은 없어?”

“이것아, 내가 너 때문에 환장한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돈이 있다구.”

“에이, 아빠도 없다고 하면서도 몇 천만 원 모아놓았으니 엄마야 1억 더 모았겠지.”

“나 미쳐...”


잠시 말이 멈춥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텐데 다들 망설입니다. 그때 사위인 김 사장이 나섭니다.

“저 이러면 어떨까요? 어머님이 돈 모아 놓으신 게 없다 하시니, 우리 두 집에서 돈을 내어 거기에 다시 채워 넣는 걸로.”

“김 서방, 좋은 생각이네. 우리도 없지만 부담할게.”

“그럼 오빠네랑 반반씩 해요.” 하는 지수 말에 남편 김 사장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다 내도 되지만 형님네가 1/3, 우리가 2/3, 어떻습니까?”

그 말에 아들 준모가 뭐라 대꾸하려는데 아내 경미가 가로챕니다.

“네 고모부, 고마워요. 고모네가 조금 더 애써주세요.”


(영화 [덕구] 스틸컷)



앞으로 김수호 군은 수업시간에 계속하여 “띵! 똥!” 소리가 울릴지 모르겠군요. 그 짬에 외할아버지를 잠시 생각하고. 언니 현선이가 프랑스 유학 갔다 오면 민선이도 미국 어학연수 떠날 때 또 할아버지를 떠올리겠군요. 앞으로도 할아버지의 자동이체는 하늘에서 매월 26일에 빠짐없이 배달될 테니까요.


*. 마지막 사진을 제외하곤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오늘 글은 실화가 아니라 허구입니다. 다만 저는 손녀 둘과 손자 한 명에게 매월 소액을 13년째 자동이체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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