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선생님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52편)

* 선생님의 선생님 *



40년 가까운 교사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선생님들이 계시다. 그분들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선생님'이란 제목을 붙였다.



(1) 1979년 5월 어느 날



이십 대 중반, 부산 모 여중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우리 반 한 소녀가 가출을 했다. 가출 사유는 '공부 안 하고 쬐끄만 게 멋만 부리며 다닌다.' 하여 제 언니에게 얻어맞고 집을 나갔단다. 교사 2년 차의 열성으로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나 오리무중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장에서 좌판 행상하던 홀어머니도 사흘 지나자 포기했고, 나도 일주일 지나자 지쳤다.

그때는 담임이 사고경위서 한 장에 결재 과정을 거쳐 처리하면 퇴학. 그러면 한 애의 학적은 완전히 없어졌다. 결재는 학생주임, 교감, 교장 순. 위 두 사람은 그냥 형식적인 절차일 뿐 학생주임 도장만 찍히면 사실 끝이었다. 내가 방과 후에도 찾아다니는 걸 보았으니 주임 결재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정선생님, 하루만 더 찾아볼 순 없는지요?"

"학생주임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일주일이나..."

"네 잘 압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애쓰셨는지. 그래도 저랑 같이 한 번만 더 돌아봅시다. 남자아이들은 드물지만 나중에 가출이 훈장이 될 경우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학창 시절에 문제아였지만 훗날 개과천선하여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는 식으로. 하지만 여자 아이들은 가출하면 끝입니다. 술집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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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사흘간 그분과 둘이 '서면' 바닥을 샅샅이 뒤졌고, 'ㅇㅇ롤러스케이트장' 뒤 창고에서 못 먹어 피골이 상접한 채로 있던 그 애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 애는 2학기에 또 가출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의 학생주임은 55학번이었으니 내가 태어나던 해 대학 입학했다는 말이다. 그분이 남긴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부모님들은 삶에 지쳐 아이를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교사마저 포기하면 아이들을 구제해 줄 사람은 이 너른 세상에 한 명도 없게 됩니다."



(2) 1980년 4월과 12월 어느 날



1980년 12월,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영화에서나 보는 장면을 목격했다.

교정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이 땅에서 거름으로 변해 갈 즈음,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교무실이 2층이었는데 바로 위인 3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교무실 바로 위 교실 담임은 부리나케 일어나 자기 교실로 향했고. 전에도 아이들이 책상 부딪치는 소리에 교감에게 한 소리 들은 적 있었던 터라 선생님이 그리 행동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

그런데 이번 소리는 한 학급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듯했다. 운동장 쪽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위로 올려다보니 세상에! 4층에 있는 3학년 전 학급 학생이 입을 모아 고개를 내밀어 한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닌가.

"선생님!"

그날 그 시간 이후 나는 '선생님!' 하는 소리를 이때보다 더 감동적으로 들어본 적 없다. 아이들이 입을 맞춰 운동장으로 걸어가는 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외치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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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학교에 오기 전부터 그 선생님은 이미 전설이셨다. 다만 그분과 근무한 지 고작 일 년 안 된 나만 제대로 의식 못했을 뿐. 처음 그분을 느꼈던 건 4월 어느 날 교무회의에서였다. 교장을 대신한 윤리주임이,

"우리 학교 설립자인 정ㅇㅇ 이사장님께서 이번에 시집을 펴냈는데 학급 당 20부를 의무적으로 갖고 가시기 바랍니다."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사장이 시집을 냈으니 각 담임은 20부씩 갖고 가서 학부형에게 팔아라는 명령(?)이었다. 사십여 년 전 사립학교에서는 통상적으로 있던 일.


그때 그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전 학교는 물론 그 이후 다른 학교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던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제가 이사장 님이 설립한 학교에 근무하니 한 권 사겠습니다. 그리고 학부형들에게도 소개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강매는 거부합니다."

한순간 교무실 안은 적막만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함. 그 뒤의 일은 적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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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2월 기말고사를 앞둔 교무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학교는 오래된 건물이라 한 학급 당 70명의 학생을 두기엔 교실이 너무 좁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두 줄씩 묶어 네 분단으로 할 수 없으니 넉 줄로 묶어 둘로 나눈 뒤 가운데만 통로를 둔 방식을 택해야 했다.

그러니 맨 구석에 앉은 애는 나오려면 세 명의 친구를 뛰어넘어야 하는 구조. 아마 남학생들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으리라. 얼마나 많은 마찰이 생길지는 불을 보듯 환한 일.


헌데 여학생이라 해도 시험칠 때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시험 칠 때만은 두 줄을 복도로 빼내 시험 치게 했다. 커닝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교무주임은 늘 하던 말을 하고 앉으려는데 그분이 일어났다.

"지금 겨울이라 복도가 너무 춥습니다. 아무리 두터운 내의를 입었다고 해도 춥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믿는 방향에서 책상과 책상 사이에 가방을 올려놓고 치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 뒤 이어진 논란. 교장과 교감까지 교무를 편드는 상황에서도 '어른들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아이들의 관점에서 보자.'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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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지만 그밖에도 몇 년 동안 부딪치며 생활해 오다가 결국 그날 학교를 떠났던 것이다. 아이들은 누가 자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잘 안다. 수업시간에도 남다른 교수법으로 늘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었고, 생활지도 면에서도 저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었으니 아이들이 창문에 모두 매달려 "선생님!" 하고 한마음으로 외쳤을 터.

그날 내 곁에서 함께 운동장을 내다보던 윤리주임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참고로 두 사람은 업무로 하여 가장 많이 부딪친 사이다.)

"저 사람이 바로 페스탈로치다!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저 선생님이!"

이듬해 순위고사를 보아 공립으로 갔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그분의 뒷소식은 모른다.



(3) 2003년 6월



하는 일 없이 바빠 두 번이나 OO국어교사모임에 빠졌다가, 어제 시간이 조금 남아 모임에 들렀다.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장ㅇㅇ 선생님과 김ㅇㅇ 선생님과, 최ㅇㅇ 선생님. 그리고 등지고 앉았으나 뒷모습이 눈에 익은 한 사람...

참으로 반가운 사람이지만 여기에 와선 안 될 사람이었다. 그 선생님은 출산 휴가로 친정에 가 있는 걸로 아는데, 오늘내일하며 비상대기조에 들어간 줄로 아는데, 늘 그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인 양 앉아 있었다. 그뿐일까? 언제 준비해 왔는지 '우리말 어원'을 조사해 온 인쇄물을 일행들 자리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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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임이든 발제(모임에서 어떤 주제를 연구해 와 주장을 펴는 일)를 맡으면 신경이 곤두선다. 일단 공부할 시간을 빼내야 함은 물론 준비를 제대로 해 발표를 막힘 없이 해야 하고, 토론거리를 이끌어내야 하는 강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8명 회원이 매주 갖는 모임이라 두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발제일은 그래서 다들 부담스러운 날이었고, 오늘이 그 선생님이 발표하는 날이긴 했다. 그래도 내가 두 번 결석하는 사이에 다른 이가 대신하는 줄 알았지 가누기 힘든 몸을 이끌고 와 발표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선생님은 열흘 뒤쯤 출산하셨다)


그날, 모임 이래 가장 적은 인원이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참석으로 어느 때보다 가득 찬 자리가 되었다. 모임이 전보다 활기 떨어져 걱정했는데, 나타에 젖어 점점 흐릿해져 감을 아쉬워했는데, 그 선생님은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 언제나 자기 몫 이상으로 헌신하던 분, 삶 나누기 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했던 얘길 들려줄 때마다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던 참으로 고운 여인, 자습서에만 매달려 가르쳐도 중간은 차지하던 그 시절, 교사란 공부를 손에 놓아선 안 됨을 실천으로 깨우쳐 준, 그녀는 나보다 열댓 살이나 어린 직전 회장 김ㅇㅇ 선생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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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 분 말고도 저의 스승님은 여러 분 더 계시나 지면 관계로 줄입니다. 교직생활 35년, 그 사이 재단에 밉보여 영원히 잘릴 뻔한 적도 있는 등 굴곡이 많았지만 그래도 탈락하지 않고 끝맺을 수 있었음은 바로 이 분들이 보여준 모범적인 교사상을 곁에서 보았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 사진은 모두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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