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학급의 일상
작은 공간에 넷. 목적은 하나!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이들은 언어마저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감과 상대의 몸짓과 반응에 의존할 뿐!
마스크 사이로 숨이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긴장을 더한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두 숨죽여 같은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땡!’
어느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의 시놉시스가 아니다. 우리 반 쉬는 시간의 모습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까지 긴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할리갈리’다. 게임 참가자는 우리 반 아이들, 베트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 등 국적이 모두 다른 학생들이다. 다들 아직 한국어가 어려워 우리 반에서 한국어 의사소통을 배우고 있다. ‘같이 놀래?’ ‘좋아’ ‘싫어’ 정도만 간단히 의견을 나누고, 게임 중에는 말보다는 눈치와 표정으로 소통한다.
소통의 제약이 너무나 크지만, 또래를 만나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제약이 있을까?
가로막히면 막힐수록 뛰어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각기 다른 국가의 배경을 가지고 있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은 높았지만 서로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장벽을 넘었나 보다.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번역기를 사용했다. 실시간 통역사가 옆에 있듯이 번역기를 틀어놓고 대화를 하였다. 생각과 의사를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하고 받을 수 있었지만, 번역기가 작동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번역기가 오역을 하는 바람에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다른 시도를 했다. 말을 아예 안 하고도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제기차기, 고리 던지기였다. 하지만 오로지 몸으로만 노니 놀이에 깊이가 생기지 않았다. 곧 흥미를 잃었다. 한창 왁자지껄 떠들고 싶어 할 아이들인데 당연했다.
한 번은 말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방법, 한 번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시도하다 결국 중용의 길을 선택했다. 적당히 언어적이며 적당히 비언어적인 놀이인 ‘할리갈리’다. 카드에 그려진 과일이 없는 나라는 없었고, 규칙까지 간단한 데다 적당히 말과 몸을 쓰니 아이들에게 딱 맞았다. 그 뒤로 쉬는 시간만 되면 교실 뒷공간에서 ‘바나나, 포도 몇 개?’ ‘땡’ 소리가 계속 들렸다. 요즘은 발전하여 ‘너 틀렸어.’ ‘00 차례야’ 등도 들린다.
모든 것을 낯설어하는 여러 나라 아이들이 우리 반에 처음 와서 얼마나 서먹하게 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한국어도 낯선데 중국어, 러시아어, 베트남어가 섞이니 더욱 눈치만 봤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여러 방법을 찾은 것이 얼마나 대견하고 귀여운지 모른다. 그리고 그 해답이 얇은 카드인 것도 귀엽다. 카드 하나로 함께 웃고 친구가 되는 걸 보면 화합이나 평화의 방법이 대단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저 함께하고 싶은 생각과 적당한 도구만 있으면 충분하다.
계속 이어오던 증오범죄와 인종차별 소식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더 자주 들린다. 답답하고, 걱정된다. 마음 같아서는 세계 곳곳에 ‘할리갈리’라도 뿌리고 싶다. 사회적 문제가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되진 않겠지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서로를 향한 긍정적인 관심인 것은 확실하다. 모든 배경을 초월한 긍정적인 인식만 있다면 함께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이들이 ‘할리갈리’를 발견한 것과 같이 말이다.
(코로나19가 심해지면서 아이들의 할리갈리를 금지해야 하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