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직장의 신 17화

도와줬을 뿐인데 승진이 빨라졌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의 역설

by 한금택

도와줬을 뿐인데 승진이 빨라졌다?

직장인이라면 사표 다음으로 가슴에 품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이 한 문장에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함께 등장합니다. ‘호의’란 상대를 배려하는 순수한 마음이며, 법적·조직적 의무가 전혀 없는 행동입니다. 즉, 시간·노력·자원을 기꺼이 내어 주는 공급자와, 그 호의를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요자가 존재합니다.

수요자는 거듭된 호의를 점차 당연한 몫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다 호의가 멈추면 “왜 그걸 안 해 주느냐”고 따져 묻기도 하지요. 결국, 공급자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 간의 균형이 쉽게 흐트러집니다. 여기서 균형이 깨진다는 것은, 서로가 동의한 규칙이 사라진 채 공급자만 일방적으로 부담을 떠안게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시절, 워라밸이라는 말이 생기기 훨씬 전의 이야기입니다. 야근이 일상이던 어느 날, 몸살 기운으로 간신히 정시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B팀 김 대리가 허겁지겁 뛰어왔습니다.


“팀원 한 명이 갑자기 퇴사해서 테스트 인원이 부족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 부탁을 수락한 결과, 며칠간 ‘임시 테스터’로 B팀 프로젝트를 지원했습니다. 프로젝트는 무사히 끝났지만, 그다음부터는 마치 제가 B팀 소속인 양 업무 요청이 쏟아졌습니다. 세 번째 부탁을 거절하리라 다짐했지만, 이미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뒤였습니다.

그때 저는 호의가 권리로 둔갑하는 상황을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B팀은 초기의 저에 대한 호의에 따뜻한 감사의 마음은 사라지고, “이건 네가 해야 할 일”이라는 암묵적 기대만 남았으니까요.


요즘엔, 주 52시간 근무제와 직무기술서 덕분에 요즘 조직에서는 업무·책임의 경계가 훨씬 선명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직원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 이 문장이 평서문이 아니라 조건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핵심은 ‘계속되면’이라는 단서에 있습니다. 즉, 공급자가 언제든 멈출 선택지를 쥐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TIP | 멈춤의 신호등

두 번 이상 같은 부탁이 반복된다.

업무 범위가 본래 역할을 침범한다.

감사 인사가 의무 요구로 바뀐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하면, 한 박자 쉬어 갈 때입니다. 상대의 호의 인식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소진(burn‑out) 으로 이어집니다.

직장에서는 동료·선후배 간 업무 지원이 빈번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급자가 주도권을 쥐고 호의를 관리하는 일입니다.



호의에 대한 목적과 범위를 분명히 구체적으로 관리합니다.

호의에 따른 업무지원 기간이나 횟수를 미리 정하면 도움을 주는 입장에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집니다.

마지막으로 지원이 끝나면 결과·성과를 공유하고, 감사 표현이나 공식적인 인정을 요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호의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윈‑윈 협력이 가능해집니다.

오늘날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내 일, 네 일’ 구분이 뚜렷해진 만큼, 먼저 호의를 내미는 일은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 호의는 상대를 ‘중독’시키는 마약이 아니라, 관계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공급자는 언제든 스스로를 보호할 브레이크를 장착해야 합니다.


호의 뒤에 인간에 대한 실망이 따라 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종종 **‘공급자의 장기적 승리’**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그러나 잘 설계된 호의는 장기적으로 큰 수익으로 돌아옵니다.

평판 자산: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브랜드 형성

관계 자산: 조직 내 신뢰 네트워크 확장

경력 자산: 승진·연봉 협상 시 강력한 근거 자료

결국, 호의를 현명하게 이어가는 사람이 장기적으로 더 큰 이득을 얻습니다.

배신감이 두려워, 손해보는 것이 두려워 미리 호의를 베푸는 것을 포기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언제까지, 얼마나, 왜”를 분명히 하고, 멈춰야 할 때 멈출 수 있는 용기를 장착한다면, 그 호의는 수요자에게 ‘당연한 권리’가 아닌 서로의 든든한 성장 엔진이 될 것입니다.

DSC_2759.JPG


keyword
이전 16화복도에서 감당할수 없는 질문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