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_ 로레토의 성모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_ 로레토의 성모
12. 황금 심장의 고리
황금 제도의 중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작은 섬, 황금 심장 섬.
섬의 중심에는 순금이 들끓는 거대한 황금 늪이 있었고, 그 위에 자신의 둥지를 튼 불사조가 영생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제도에서 가장 작고 먼 곳에 있지만, 순금을 생산해 내는 곳이기에 황금 심장의 섬은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섬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황금 심장 섬의 불사조들은 이곳에서 10년에 한 번씩 황금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는 황금 심장의 순혈을 낳을 수 있는 여자인 성모가 태어났다. 오직 성모의 태에서 난 자만이 황가를 이을 수 있었고, 황제의 자손들은 황가를 받드는 귀족이 되었다.
성모들은 모두 머리에 황금빛 고리가 떠 있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동정녀, 즉 타인과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모두 동정녀로써 황금신이 준 아이를 잉태하였고, 출산하였다. 임신의 횟수는 알 수 없었고, 다음 성모가 탄생하면 태는 즉시 끊어졌다. 태가 끊어진 성모들은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황실에서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았다. 성모들은 황금 심장 섬에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그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마음을 접지 못하고 관계를 맺는 순간 머리 위 황금 고리는 사라졌다. 이는 황금 늪의 타락을, 더 나아가서는 황금 심장 섬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황실 위에 존재하는 황금 신전의 신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딱 한 번, 이를 어겼던 성모가 있었으나, 그녀와 그녀의 연인이었던 황금 심장의 둘째 황자는 펄펄 끓는 황금 늪에 던져지고 말았다.
막 스무 살이 된 성모 리아나가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을 때, 온 섬은 기쁨으로 들썩였다. 백성들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 한 번씩 황금의 아이와 리아나를 알현했다. 아이가 한 살이 되던 날, 성벽 위에 선 황제 이오네스쿠가 리아나의 이마와 입술에 입맞추자 백성들은 더욱 환호했다. 이오네스쿠는 성모의 존재 자체와 황금 신전을 부정하는 뉘앙스를 평소에도 많이 풍겨왔기 때문에 사람들의 걱정이 컸던 터였다. 게다가 황제가 여자일 경우 성모와 황제 간에는 종종 미묘한 권력 싸움이 있곤 했는데, 두 사람은 마치 자매와 같은 다정함이 감돌았다.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리아나는 이오네스쿠의 짧고 곱슬거리는 금발에 입을 맞췄고, 황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백성들의 알현이 계속되면서, 한 소문이 떠돌았다. 리아나의 머리 위 고리가 흐릿해지고 있었고, 그 상대가 황실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백성들에게 이오네스쿠와 리아나의 인기가 높았기에 지금까지는 소문을 모른척했던 황금 신전이었지만, 리아나와 황자 알현이 건강상의 문제로 중지되었다는 것을 듣자, 결국 리아나가 머물고 있는 황궁으로 신관을 보내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실측은 강경했다. 하급 신관은 리아나가 머무는 별채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화가 난 황금 신전에서는 신전 기사들과 상급 신관을 보냈다. 당장 리아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강제로 황궁을 수색하겠다는 공문과 함께. 그러나 황금 신전으로 돌아온 것은 잘린 신전 기사들의 목과 겁에 질린 상급 신관이었다. 격노한 황금 신전은 모든 신전 기사를 불렀다. 심지어 가까운 섬에 있는 신전 기사들까지 불러모았다. 이오네스쿠가 아무리 싸움으로 유명하고 그녀의 황실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그 많은 신전 기사들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울 것이었다.
작은 섬 위, 고작 오백 명의 황실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천 명의 신전 기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 집 문을 걸어 잠그고 모습을 감췄다. 섬에서는 신전 기사들의 발소리와 황금늪이 들끓는 소리, 그리고 간간히 불사조의 울음이 들려올 뿐이었다.
놀랍게도 싸움이 시작된 뒤, 신전 기사들의 삼분의 이는 황궁의 외벽조차 넘지 못했다.
매보다 정확한 시야를 가진 이오네스쿠의 궁수들을 뚫을 수 있는 기사들은 거의 없었다. 신관들이 나서서 결계와 마법으로 무장을 해주고 나서야 신전 기사들은 겨우 외벽의 문을 부수고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싸움에 능한 이오네스쿠의 기사들이라 해도, 상대는 황금 신전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막상막하였다. 온 황궁은 핏빛 살육으로 물들었고 끔찍한 비명이 가득했다. 황금 빛 갑옷에 피를 뒤집어쓴 세 명의 신전 기사들은 자신들의 부하를 학살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황실 기사들을 뒤로하고 리아나가 있을 별채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들이 별채의 문을 활짝 열었을 때였다.
방 한가운데, 이오네스쿠가 앉아 있었다.
피에 막 담갔다가 뺀 듯 핏물이 흐르는 황금 관을 빛나는 금발 위에 비뚜름히 쓰고, 땅에 박힌 대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쥔 이오네스쿠가.
갑옷조차 입지 않은 그 고귀한 황제는 자신의 온몸을 적신 검붉은 피 따위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가 활짝 웃자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이오네스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의 적막은 성급한 신전 기사들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이오네스쿠는 신전 기사들을 향해 마치 불사조처럼 움직였다. 가벼운 날갯짓, 우아한 이륙, 아름다운 활강. 이오네스쿠는 무기를 휘두르며 덤벼드는 기사들의 팔을 잘라냈고, 가슴에 대검의 날을 박아 넣었으며, 순식간에 검을 빼어 다른 기사의 목을 날려버렸다. 불과 몇 초만에 팔과 머리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아이의 울음이 터졌다. 서러운 울음과 함께 묵직한 커튼 뒤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리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오네스쿠의 얼굴이 부드럽게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황실 기사였다.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 안심하십시오. 모두 끝났습니다.
처음으로 성모를 황후 폐하라 부르자, 이오네스쿠도 리아나도 잠깐 놀란듯 했으나, 곧 두 사람의 얼굴에 다정한 고마움이 스며들었다. 긴장이 풀린듯한 리아나를 본 기사가 곧장 리아나에게 다가와 황자를 건네받자 이오네스쿠는 리아나를 당겨 끌어안았다. 리아나의 새하얀 이마에 입을 갖다 댄 채 한참 말없이 서 있던 이오네스쿠는 밖에서 함성이 들려오자 안심한 듯 리아나의 붉은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곳에는 황금빛 고리가 더는 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