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 희미하게 보이는 말 위의 죽음
13. 메시아 (1)
대신전 서고는 오늘도 조용했다. 종종 사서들이 걸어 다니는 옷자락 소리가 바람에 모래가 쌓이는 것처럼 사락이며 들려왔지만, 여느 때처럼 그 누구도 방해받지 않고 고대의 지식과 현학에 푹 파묻힐 수 있도록 고요했다. 서고는 처음 이곳에 들어온 앳된 사서나 신관들이면 누구나 기죽어 어깨를 움츠릴 법할 만큼 차갑고 웅장한 대리석 돌들이 엄숙하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간혹 아주 일부지만, 햇빛이 닿는 홀의 바닥이나 복도는 따뜻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높은 천장 아래에는 수많은 문서와 기록물,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귀히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서고의 깊은 곳, 낮에도 초를 켜지 않으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 사서들 뿐만 아니라 대신관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제한 구역에 어둠보다 더 까만 머리를 굵게 땋아 허리까지 늘어트린 키 큰 소녀가 한 쪽 무릎을 접고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아샤였다. 불빛 덕분에 아샤의 눈은 이제 갓 열 여섯, 성인식을 코앞에 둔 아이답지 않게 여느 협곡처럼 깊고 진했으며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한 사람의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여느 아이들이라면 그날 저녁 있을 성인식을 기다리며 어느 이성이 자신의 짝이 될 것인지를 탐색하고, 어떤 옷을 입을지, 누구와 춤을 추게 될 지, 말을 몇 마리나 받게 될지 등을 생각하겠지만, 아샤는 달랐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온통 바라크, 아무것도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음의 사막, 그 거대한 저주받은 사막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아샤가 저주받은 사막에 처음 간 것은 여섯 살 무렵이었다. 탁하게 피어오른 먼지 기둥이 빠르게 그 경계를 돌고 있는 사막. 모래 먼지와 모래의 안개에 뒤덮여 사막 내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아샤는 처음 바라크를 본 순간부터 그 곳에 매료되었다. 여섯 살의 작은 탈출은 물론 사막에 도착하기 한참 전, 큰오빠와 아버지에게 붙잡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아샤는 그 뒤에도 바라크에 대한 궁금증을 놓지 않았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 산 대신관에게 틈만 나면 달려가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자신의 도시 가네덴의 역사와 저주받은 사막 바라크의 기원을 물었고, 점점 넓어지던 바라크가 결국 가네덴을 덮쳤던 이야기, 그러나 그 바라크를 뚫고 가네덴이 되살아난 이야기 등을 묻고 또 물었다. 아버지는 대신관이 한 말의 일부는 사실이지만 일부는 본인이 지어낸 이야기이니 모두 믿지는 말라고 여러 번 아샤에게 일렀다. 아버지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야 그럴 수 있다 생각했지만, 저주받은 사막 바라크에 대한 막내딸의 호기심은 과하다 여겼고 그를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경계가 무색하게, 아샤는 언제부터인지 바라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관심을 티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수천 필의 말을 보살피고 말을 탔다. 그러나 시간이 날 때면 흙냄새와 먼지로 가득한 대신전 서고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귀족은 아니었으나 돈 많기로는 도시에서 제일가는 아샤의 아버지였기에 대신전 사서들도 별 말없이 아샤를 안으로 들여주곤 했다. 그렇게 서고에서 지낸 것이 벌써 십년이 넘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쓸데없는 사랑 이야기나 말에 관한 이야기, 그림책 등을 뒤지고 다닐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샤는 서고에 존재하는 바라크와 가네덴에 관련된 텍스트는 거의 모두 외우고 있었다. 딱 한 권, 제한 구역에 숨겨져 있는 붉은 책만 제외하고는.
‘천국이나 다름없던 가네덴은 바라크에 삼켜졌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안에 살 수 없었다. 우리가 상상했던 불과 유황의 도시는 지옥이 아니다. 바라크야 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생명이라고는 단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바라크다.
지옥이 된 가네덴에서 쫓겨나 아무것도 없는 광야를 헤매던 우리 앞에 히즈라엘이라는 앳된 신관이 나섰다. 그는 이 사막화를 막기 위해서는 바라크를 이해해야 한다고, 바라크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 여겼지만, 대신관만큼은 그의 눈빛을 총명하다 여겼다. 그래서 그는 대신관의 도움으로 바라크를 향해 갔다. 가네덴 사람들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바라크는 신이 버린 장소라고, 히즈라엘이 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죽는 것 외에는 없을 거라고. 예상대로 히즈라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라크로 향한 다른 수많은 모험가와 용사들처럼.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독소가 빠지듯, 바라크가 그 영역을 좁혔고, 가네덴이 사막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가네덴의 사람들은 히즈라엘의 죽음으로 인해 가네덴이 신의 노여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를 추모했고, 그에게 감사했다. 가네덴은 다시 낙원이 되었다.’
글은 이곳에서 멈춰 있었다. 아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이게, 가네덴과 바라크에 일어난 일의 전부일까? 히즈라엘의 죽음이 정말 가네덴을 구원한 건가?
“제한 구역에, 누가 있나?”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 난감한 표정의 아샤는 재빨리 붉은 책의 마지막 장에 초를 가까이 댔다. 마지막 장의 맨 아래, 아주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네덴이 돌아온 뒤, 바라크의 경계를 맴도는 괴이하고 위험한 먼지 소용돌이가 생겼다. 가까이 갔던자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가네덴의 모든 사람은 바라크에 가는 것을 금지한다. 히즈라엘은 떠나기 전, 대신관에게 신관으로써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전했고, 신관직에서 파면된 채 바라크로 향했다.’
아샤는 그 구절을 외우듯 중얼거리고는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고 촛불을 훅 불어 껐다. 사락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