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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Oct 30. 2022

미움을 짜내고 남은 찌끄레기를 사랑이라 부르는 10월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미워했던 사람. 많이 울고 많이 웃고 살을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원망했으며,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사무쳐했다. 둘도 없는 나의 원수 같은 사람, 내 친구, 내 스승. 그러나 결국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여자.


10월은 미움이 넘쳐흘러 마구 짜내야 하는 달.


그러나 그 옆에 남은 찌끄레기를 사랑이라 부르는 달.


여름의 마지막 끝자락을 간신히 잡고 있는 요즘.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선선한 가을바람을 기대하며 좋아하는 재킷에 달린 작년의 무게 들을 털어내는 대신 올해에도 저는 그저 옷깃을 여미는 몸짓으로 간단하게 10월을 맞이하고 싶을 거예요. 애처롭게 달린 나뭇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지는 모양을 보며 그 거대한 힘에 맞서 보려 엄지를 말아 쥐어 보지만 다시금 절감하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또 한 페이지를 넘겨야만 합니다. 거스를 수 없는 불행이거나 다행인 진실 중 하나 ‘모든 것은 변한다’. 삶의 본질은 결국 변화 시킬 수가 없습니다.


저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가다 앞에 어떠한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만, 마땅한 수식어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진실로, 참, 잘, 착실히 그 어떤 것도 어울리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확실하게 가 적절하려나요? 저는 확실히 늙어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갖게 되는 것들만 가져가며 그렇게 늙어갑니다. 7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세월만큼은 저를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던져두고 소복한 눈처럼 쌓였습니다. 겨울을 채 보지 못하고 떠난 당신이 궁금합니다. 당신의 세계에도 소복한 눈이 내리는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나요?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하나뿐인 아버지와 함께 내리는 눈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았으면 좋겠다고 감히 대신 기도합니다.


여름은 태초부터 슬펐고 봄은 지천에 꽃향기가 가득해 슬펐습니다. 가을은 당신이 떠나가 슬프고 겨울은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계절이지만 같이 사랑해 줄 사람이 없어 쉽게 모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열일 다 제쳐두고 왕왕 울고만 싶어질 때가 잦습니다. 늦은 밤 틀어 놓던 티브이 소리의 의미를, 구슬픈 유행가 가락의 선율을 이제야 알아챘습니다. 외로움. 그것은 습기가 짙어 가만두기에는 주변을 녹슬게 하며 이끼가 자라게 만듭니다.


여름 장마를 종결하고 선선한 바람을 맞이하는 가을이 찾아오면 외로움의 핑곗거리가 옅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차라리 때늦은 장마를 맞이한 지금의 10월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를 핑계로 습한 마음의 환기를 뭉그적거리며 미루고 또 미뤄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라고 애써 안심하는 마음으로, 시청하지 않을 드라마의 예고편이라고 저를 속단하며 살아가고 있으나 반드시 찾아올 기색을 보이는 진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제가 확실히 나이를 먹고 당신은 여전히 머물러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것. 저는 당신과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영겁의 시간을 지나며 켜켜이 쌓였을 삶의 밀도가 버겁기도 하고, 진공 상태로 포장된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또다시 슬퍼질 마음이 무겁고도 또 미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그리지 않는 날들이 늘어만 갑니다. 작은 미래든 큰 미래든 그리는 순간 당신의 멈춰진 시간이 떠오르면서 도망치고 만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계절은 매년 찾아오지만 우리는 계절에 매번 속고 맙니다. 작년엔 이맘때쯤에 두 어깨가 가벼워졌었나? 이때쯤엔 새로 산 코트를 꺼내어보아도 될까? 매년 쩔쩔매며 되뇌어보곤 합니다. 하지만 10월. 10월이 찾아오면 계절의 흐름을 정확하게 읊을 수 있는 화자가 되곤 합니다. 당신을 보내고 나오던 밤 찬바람이 찾아와 얇은 셔츠 사이로 가을의 옅은 냄새를 뿌리고 지나가던 순간.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고작 일주일을 비운 사이에 앗아 가버린 집의 온기를. 방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퍼져나가 온몸으로 휘감던 순간 직면한 것은 두려움과 슬픔이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가장 큰 감정. 휘몰아치던 그 강렬함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면 가을이 오는 날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당신이 가고 가을은 찾아왔습니다. 매년 당신의 기일 즈음 나는 긴팔과 재킷을 준비합니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속전속결로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을 안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다 쓴웃음을 지어봅니다.


10월.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다 스스로를 미워했고, 요 연한 저 먼 곳 밑바닥을 바라보며 추락했습니다. 깨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더 남아있는 게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산화하지 못하는 마음들은 늘 체기로 남아있었고 그로 인하여 손끝은 늘 겨울이었습니다. 이제 막 쌀쌀한 가을의 초입부에서 언제나 먼저 코끝 시린 겨울을 만났습니다.


무상한 시간은 언제나 다시 봄을 데려오고 결국 돌고 돌아 다시, 10월. 나는 남은 사랑을 모아들여 바라보았습니다. 미움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어떠한 곡절로 우리를 항상 이끄는 것일까요. 맞닿아있는 작은 틈 사이의 비밀들을 알고 싶었습니다. 속속들이 알아내어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고 안식을 도모하기 위하여 긴긴밤글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유치원 운동회 때 위아래 노란색 체육복을 입고 파마머리를 높게 하나로 꽉 묶은 날. 저는 청팀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엄마들 앞에서 실수 없이 뛰기 위하여 연습에 매진했지만, 매번 마지막을 자처했던 제가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어 1등을 하고 있었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갑갑해하던 성질은 비단 명사 그대로의 ‘옷’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처지, 어울리지 않는 자리,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입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옷들을 옷장에 처박아두는 습관은 아마도 유구한 역사이지 않을까요.


1등이 믿기지 않았던 저는 뒤를 돌아보았고 나를 제외한 아이들이 모두 내 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땅에 두 다리가 박혀버린 듯 멈춰 서게 됩니다. 순식간에 꼴찌로 추락하던 순간. 1등이라는 큰 글씨를 화려하게 감싸는 월계수 잎이 가득한 도장을 손등에 찍는 대신, 토끼가 파이팅을 외치며 ‘참 잘했어요’라고 말하는 도장을 손등에 찍으며 잘했지만 잘하지 않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창피하고 후회되는 순간. 당신은 왜 뒤를 돌아봤냐며 안타까워했죠.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그때의 제가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 창피하여 저에게 화를 낸 줄로만 알았습니다. 당신의 안타까움이 저에겐 창피함으로. 당신의 걱정스러움이 저에겐 고압으로. 당신의 사랑이 저에겐 미움으로.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서로가 서로를 지나쳐갔을까요. 선택하지 않은 길엔 무엇이 있었는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저의 욕심일까요. 늦은 밤 당신이 홀로 써 내려간 회고록 속에 반성의 글들 중 제가 몇 줄이나 닮아있었나요. 닮은 그 부분을 저에게서 지워주고 싶었겠죠.


당신을 닮아 저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저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적겠습니다. 적을 수 있는 글이 아직은 이것뿐이라 그 보잘것없음에 한없이 작아지지만 진실 만을 말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미워하며 동시에 사랑하듯 저는 당신을 생각하면 매 순간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만 동시에 그 심연을 빠져나올 자력을 얻습니다.


그러니 가을에 먼저 떠난 것을 안타까워 마세요. 매일 밤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누더기 같은 아픔을 덮고 잠들더라도 아침이면 간단한 눈 맞춤으로 또 다른 나를 만납니다.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뛰어가는 제가 있습니다. 실패를 동력으로 삼아 다른 차원의 문을 두드리는 또 다른 미래가 아스라이 어른거립니다.


당신은 어느 가을날 가만히 기다려주세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보내고 7번째 가을을 맞이하는 어느 날. 사랑하는 당신의 첫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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