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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Oct 30. 2022

중경삼림과 매미의 상관관계

당연히 죄가 없는 추억




시간을 아무리 미뤄도 내일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데, 불안감이 심해질 때면 내일을 미루고 싶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다. 취침 약을 먹어도 기절하듯 잠에 들기는커녕 뜬 눈으로 가장 쓸모없는 생각들을 하며 괴로워한다. 새벽에 하는 흐려진 판단력과 무뎌진 기준으로 만들어내는 쓸모없는 생각들 말이다. 결국 아침에 피로감에 허덕이며 굳이 안 써도 될 돈을 써가며 택시를 타고 출근을 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은 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붐비는 출근시간에는 캠퍼스 옆길을 이용하기보다는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것을 알고 있지만 기사님이 우회전을 하는 순간 '아.. 네비대로 따라가시는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차마 더 나은 지름길을 제시하지 못한 채 도착하면, 기사님이 이제 보니 캠퍼스 안으로 들어오면 더 빨랐겠네요. 하고 왜 말을 안 했냐며 아쉬워하신다. 그것은 결코 타박이나 핀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머쓱해진 나는 타이밍을 놓쳐서 그렇다는 궁색한 변명과 멋쩍은 웃음을 달고선 택시에서 내린다.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기는 것은 아빠의 습관 중 하나이다. 집에서는 본인이 왕인 마냥 가족들 위에서 군림하며, 별것도 아닌 일에 자존심을 세우려 노력하곤 했다. 그러나 밖에서는 너무나도 관대한 사람이라 손해를 보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삼키는 사람이 아빠였다. 그런 점이 너무나도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집이나 밖이나 일관된 태도를 보여줬다면, 성정이 싫은 소리를 못하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아무 관련 없는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가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쉽게 주는 것이 비겁해 보였다.

절대 비겁하게 굴진 말아야지. 혼자서 다짐했기에 이렇게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모습이 등장할 때면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다. 미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혹시라도 닮아버린 것은 아닐지 의심하는 순간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깨지 않는 악몽 속에 침잠한다. 도저히 좋아지거나, 인정할 수가 없어서 더욱 발버둥 쳤다. 늘 같은 그림 찾기를 하곤 했다. 같은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있다면 왜 같은 건지, 같다면 왜 눈치채지 못하고 이제야 발견했는지. 정해진 개수를 맞추면 끝내는 게임이 아니라서 끝없는 검열과 분석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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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후 수없이 많은 밤을 질책했다. 대상은 목적지를 잃은 나침반처럼 갈팡질팡하여 명확하지 못했다. 엄마를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 나였다가, 아빠였다가 결국 다시 나였다가. 눈을 감아도 뜬 것처럼 생생한 지난날이 스쳐 지나가는 날이면 한참을 앓았다. 이러한 자기 비하 속에서 아빠는 늘 부재중이었다.


부재중이어도 크게 외롭진 않았다. 아빠가 해외출장이 잦은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는지도 가늠이 안 되는 나라에 내가 아주 갓난쟁이였을 때부터 일을 하러 갔다. 덕분에 우리 가족의 대화는 뒤죽박죽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지난번 보내준 사진을 보니 살이 까맣게 탔던데 더위에 힘들진 않은지 물었다. 이렇게나 떨어진 거리만큼 아빠와 나의 간극은 멀어져 갔다. 그래서 아빠가 다시 훌쩍 떠나길 바란 적도 있었다.


가족이 아닌 잠깐 머물다가는 손님이 아닐까 생각했다. 호텔의 일회용품에 익숙해진 아빠는 칫솔과 치약의 위치를 알지 못했으며, 그것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내가 어쩐지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장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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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어색함을 아빠도 읽어냈던 것 같다. 그래서 희귀한 향초, 진짜 코끼리 상아로 만든 장식품, 원주민들이 쓴다는 가면, 그 나라의 화폐까지 가득히 쏟아내놓곤 설명해 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그저 관망했을 뿐 흥미롭진 않았다. 낯선 물건들이 주는 생경함만 남았다. 외국이란 이렇게 멀리 있구나. 소심한 아이가 갖는 소감은 여기까지였다. 그것들이 모험심을 일으켜 질문이 활화산처럼 쏟아지리라 기대한 아빠에겐 어쩐지 맥빠진 감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 끝도 없는 세계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 나라의 향신료 이야기, 알 수 없는 언어 이야기 따위는 모두 심드렁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는 알 필요가 없다는 고집이 어린 시절 존재했다. 나의 세계를 침범 받기 싫은 만큼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오게 되면 어김없이 나의 세계는 침범 받았다. 심리적 부담감으로 인한 침범뿐 아니라 실제로 물리적인 침범이 일어났다. 출장을 다니며 사 온 물건들이 온 집안에 넘실거렸다. 앉아서 해리 포터를 읽던 탁자 위에도, 디즈니 만화영화를 시청하던 티브이 위에도 온통 아빠의 물건으로 가득했다. 그 수집이 결코 달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달가운 수집이 있었는데 바로 음반 수집이었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중경삼림의 삽입곡인 줄도 모르고 테이프 진열장에 서서 하나씩 카세트에 넣어보다가 알게 되었다. 아바, 스콜피온, 발음도 어색한 샹송 등 어린아이가 알 수 없는 음악들을 미리 접하게 되었다. 영어 발음을 반복해서 듣기 위해 사준 카세트 플레이어는 음악을 돌려 듣는데 썼다.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노래하는 걸 들으며 쓸쓸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중경삼림을 보다가 그 노래가 나왔을 때 반가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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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주문 한 LP 장식장이 도착했다. 호두나무 원목으로 만든 장식장은 색감도 마음에 들고, 짜임새도 견고해서 음반들을 넣어보니 그 모습이 더욱 멋졌다. 아빠는 무엇이든 직접 해보는 걸 좋아했다. 음반은 턴테이블, CD플레이어. 영화는 영화관에서. 지금 나는 퇴근 후 턴테이블로 좋아하는 음반을 즐기는 시간을 갖는다. 영화 역시 마음에 드는 영화가 개봉하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쪼개 심야영화라도 보러 가고야 만다. 엄마와 동생은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주로 아빠와 영화를 많이 봤었다.


갓 튀겨낸 팝콘을 들고 심야영화를 본 후 서로 재미있었던 장면을 이야기하며 영화관을 나서던 일. 음반이 아닌 음원세대로 교체되면서 mp3가 유행하던 시절, 아빠의 CD플레이어로 반에서 혼자 CD를 듣던 일. 대학교 입학 선물로 사진은 핸드폰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어봐야지 하며 DSLR을 손에 쥐여준 것을 계기로 사진동아리에 들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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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 수 없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아빠에게서 부여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에 닮아버린 모습으로 LP까지 수집하게 되었을 때, 패배한 기분을 느꼈다. 내 취향이 꼭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얼마나 닮았는지 깨달을 때마다 내가 어디로부터 출발해서 지금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다시금 추억할 수 있게 된다. 그건 평생의 축복일 수도 아니면 절망적인 불행일 수도 있다.

그 대상이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변했을 때, 사람은 홀연히 사라지고 연기처럼 자욱이 남은 추억에 방황하게 된다. 추억은 어디에 두면 되는 걸까. 추억까지 미워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잊은 척 여기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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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날 중경삼림 리마스터링 LP 판매 소식이 들려왔다. 계속 때를 놓쳐 이번에야말로 사겠다고 마음을 먹어 겨우겨우 구할 수 있었다.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에겐 가끔 수집이 목표가 될 때가 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손에 넣는다는 희열을 만끽하고 싶은 욕구이다. 중경삼림 음반도 LP를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인기가 있는 앨범이다. 그렇지만 나에겐 '캘리포니아 드리밍' 이 전부였다. 이것은 오래간만에 수집을 위한 수집이 아니라 듣고 싶은 앨범이었다.


매미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에 노래를 틀어놓고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저녁 바람을 쐬었다. 얼마 전 친구가 해준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매미는 7년의 시간 동안 땅속에 있다가 땅 위로 올라와선 짝짓기를 끝내면 대략 7일 정도만 살다가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매미가 그렇게 여름 내내 울어대는 것 같아 지겨울 정도였는데, 고작 일주일 남짓 살다가 가는 것이 충격이었다. 달갑지 않은 매미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 건 이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였다. 사라질 것들은 사라진다는 이유만으로도 마음껏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매미의 마음이 되어 다시 노래를 들어본다.


중경삼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중경삼림 대사 중 가장 탐탁지 않은 대사지만, 매미는 본인의 유효기간을 알았을지 몰랐을지 궁금해졌다. 사랑의 유효기간을 만년으로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유효기간을 모르더라도 힘차게 울어댈 것 같은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미래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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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죄 없는 습관과 취향을 미워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와 닮은 모습은 정말이지 죄가 없다.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 고집스러운 모습. 그 고집스러움이 여름 내내 아니 평생 이어질 거라면 마음껏 울어보자고. 침범당한 세계가 아닌 그냥 이게 나라고 인정하자고.


금성무가 말했지. 사람은 변한다고 어제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매미의 울음이 잦아드는 여름이 끝나면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내 것을 내 것이라 당당히 울부짖고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있을 수도 있다. 늘 노래로만 듣던 캘리포니아에 갈 수도. 한 겨울에 캘리포니아를 꿈꾸는 허무맹랑한 노래 가사처럼. 살아있는 모든 것에 경외를 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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