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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Oct 30. 2022

그녀의 세계와 그녀가 살면서 가본 적 없는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




힘겨운 항암 치료를 시작하던 어느 여름날 엄마는 갑자기 암이 낫기만 한다면 식도락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곳곳을 누비며 계절이 주는 아름다움도 느껴보고, 무작정 맛난 것 만 찾아다니는 여유로운 그런 여행. 아등바등 돈을 신경 쓰느라 눈치 보던 지난날 대신 이제는 누리고 싶다고.


엄마는 짠순이 중에 짠순이였다. 가지고 있는 자본을 투자하거나 불려서 돈을 모으는 것에는 영 젬병이었다. 그저 착실하게 버는 돈을 안 써서 모았다. 그렇게 된 이유가 하나 있다. 한때 엄마가 요즘 한창 유행하는 주식에 빠져서 전 재산을 반 토막 낸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유치원생이었고 엄마는 식음 전폐하느라 결국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셔서 나와 동생을 돌봐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돈은 안 써서 모으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해리 포터에 나오는 주문만큼이나 강렬한 주문을 외워 댔다. 돈은 그냥 정직하게 아껴서 모으는 거야.


그 마법 같고도 강렬한 주문 때문일까. 아직도 나는 돈을 쓸 때마다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느낀다. 물론 내가 사치스러운 소비를 했을 때 따르는 마음의 부담감은 당연하겠지만, 가끔은 새로운 경험을 할 때나 영혼을 배부르게 해주는 소비에서도 부담감을 느낀다.


그 예를 들자면 여행이다.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본 적이 손에 꼽는다. 엄마에게 1순위는 의식주에 대한 소비였고, 2순위는 자식들의 교육에 대한 소비였다. 그리고 3순위 아빠의 사치품을 위한 소비. 마지막으로 엄마를 위한 소비는 늘 빈칸이었다. 엄마는 꼭 필요한 소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치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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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너무 나도 공부를 좋아하고 또 잘해서 반에서 늘 일등을 했지만, 여자는 길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든 사람. 엄마는 2녀 2남 중 둘째였지만, 첫째인 이모는 일찍이 이모부와 결혼을 한다며 집을 나가버렸고 그 덕에 졸지에 첫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가엾은 엄마는 일찍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막내라도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외할머니의 부탁에 따라 그녀가 공장에서 일한 돈은 고스란히 외삼촌의 학비며, 용돈이며, 때로는 2:2 미팅을 하는데 잘 보여야 한다며 부탁한 데이트 비용으로 흘러갔다.


엄마는 늘 말했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거랑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거랑 천지 차이야. 그건 정말이지 너무 나도 다른 거야'


그래서 엄마는 때때로 나에게 질투하곤 했다. 너는 참 좋겠다. 엄마가 영어 학원도 보내주고 수학 학원도, 피아노도, 컴퓨터 학원까지 보내주잖아. 영어 연극은 잘 준비하고 있니? 대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넌 모를 거야. 정말로 나는 친구들 중에 제일 많이 학원을 다니는 아이였다.


항상 내 몸보다 더 큰 가방에 교재들을 넣고 영어 학원이 끝나면 수학으로 다시 피아노로 다시 컴퓨터로 때로는 논술 학원으로. 다 끝나고 돌아오면 9시가 훌쩍 넘었다. 엄마의 퇴근 시간과 나의 귀가 시간은 늘 같았다. 나는 사실 그때는 감사한지 뭔지도 몰랐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때로는 버겁고 힘들었다.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힘든 나를 질투한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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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교육에는 대치동 치맛바람 부럽지 않게 돈을 쓰는 엄마가 교육을 제외한 모든 것에는 철저하게 짠순이였다. 어린 시절엔 유치하게 집착했던 갖고 싶던 브랜드 운동화도 아무리 조르고 졸라도 단 한 번도 사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여행도 가고 싶다고 말하면 엄마는 항상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여행은 나가는 순간 돈이야. 교통비도 돈, 숙소도 돈, 가서 음식 사 먹는 것도 돈. 그렇게 길바닥에 돈을 버리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니? 가만히 집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고 쉬는 게 훨씬 낫지. 그렇게 놀이동산도, 영화관도, 취미 생활도 모두 조금만 더 안정되면 하자고 엄마는 항상 미루곤 했다.


이렇듯 엄마 밑에서 자란 나도 자연스레 아끼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찌 보면 모든 욕구를 차단 시킨 채 살아왔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나의 세계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말고 다른 소비는 늘 안 해도 그만이라고 믿으며 커져 갔다. 그러던 내가 엄마가 갑작스럽게 떠나고 나서 소위 말해 멘붕이 왔다. 늘 주인처럼 그녀의 통제 아래 세계를 꾸리던 내게 이제 알아서 세계를 꾸리라고 하니.


이거야말로 밭을 갈아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비료 뿌리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밭 주인은 그냥 방치했다. 땅이 메말라 가든 말든 원래 있던 열매들이 썩은 내를 풍기며 온갖 벌레가 꼬이든 말든. 그래서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이게 내가 원래 살던 세계야. 하며 나를 숨겼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절친한 친구는 나를 이렇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는지 부산 여행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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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갈 원해본 경험이 유난히 작았던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는 매우 생경한 단어였고, 여행은 나가는 순간 돈이라는 엄마의 말이 아직 귓가에 생생한데 그런 세계에 내가 발을 들여도 되는 걸까? 혹은 엄마가 떠난 나는 항상 슬픔에 잠겨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여러 생각들을 휘감은 채 두려워하면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그때 나이 23살이었다. 살면서 생에 처음으로 가본 부산이었다. 가만히 광안리 바닷가에 앉아 야경을 바라보는데, 식상하지만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라는 걸 느끼며 감탄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도 분명히 야경을 본다면 여행이 단순히 돈을 버리는 일이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을 텐데. 때로는 돈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살 수 있다는걸.


살면서 그녀가 가보지 못한 세계는 얼마나 될까?


엄마가 말하던 그 안정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자식들을 다 출가 시키고 모든 노후 자금을 마련하면 그제 서야 엄마는 광안리의 야경을 볼 수 있었을까? 아님 또 다른 이유가 생겨 계속 미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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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날, 엄마가 치료를 무사히 마치면 여행을 다니겠다고 선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티브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보고 싶다. 티브이에는 담양 대나무 숲길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담양 대나무 숲길은 영영 가보지 못했다. 엄마는 5회의 항암 치료와 3회의 방사선 치료를 미리 예약해뒀지만, 그 치료 들을 다 받지 못하고 떠났다. 달력에 빨간색으로 체크한 엄마의 글씨체가 너무 슬펐다. 한때는 다음 달에 찾아올 그녀의 세계였다. 장례식이 끝난 후 사망 신고를 하고 가족 관계 증명서에 인쇄된 엄마 이름 옆 사망이라는 글자에 오열했다.


나는 그녀의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가끔은 그 세계를 증오했다.


그러나 증오한 만큼 나와 가장 오래 공유한 세계이다. 함께 살 부대 끼고, 웃고 떠들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다시 화해하던 하나의 세계가 영원히 사라졌다. 내 몸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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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가을날. 담양으로 여행을 갔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스쳤기 때문이다. 큰맘 먹고 스파가 딸린 좋은 펜션을 예약했다. 가장 맛있다는 떡갈비 맛집도 찾아서 죽통 밥과 함께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죽녹원에 가서 바람에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대나무 잎 사이로 가장 높은 하늘이 오는 계절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색이 온통 눈이 부실 만큼 예뻤다. 저녁쯤에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따라 사진을 찍다가 관방제림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엄마가 같이 왔다면 아이처럼 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대나무 길을,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어본 적 없이 살다가 죽는 사람도 분명 어딘가 존재한다. 우리 엄마 또한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불쌍하다거나 슬프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녀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미운 마음으로 가득 찼던 엄마에 대해서 이제는 정말로 엄마의 세계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던 세계.


그녀가 공장에서 번 돈을 본인의 학비로 사용했다면 어떤 세계에 가있을까?

그녀가 해마다 지역을 정해 식도랑 여행을 맘껏 다녔다면 어떤 세계를 만났을까?

그녀가 자신을 위한 세계를 많은 빈칸으로 두는 것 대신 더 채우려 욕심을 냈다면.

너무 많은 희생 대신 얄미울 정도로 본인 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세계로 가득 채웠다면.

지금쯤 우리 같이 손잡고, 그녀가 살면서 가본 적 없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그녀의 세계보다 내 세계가 더 커질 날을 생각하면 어쩐지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다. 영원히 정지된 세계. 아무도 찾지 못하지만 그러나 분명히 언젠가 존재했던 세계. 그 사실이 너무 나도 나를 슬프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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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적용되는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때때로 그녀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들로 스스로를 할퀴는 날들이 있겠지만, 자꾸만 주저앉고 싶거나 포기하고 싶어 눈물짓는 날도 있겠지만, 엄마가 너무너무 그립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세계까지 짊어지고 나의 세계를 더 크게 확장시킬 것이다. 남겨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떠나간 사람에 대한 유일한 몫이라고 생각하기에.



계속해서 가본 적 없는 세계로 멀리 저 멀리까지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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