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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시간, 연대의 얼굴들

by 박기종 Mar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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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무심코 카메라를 들고 광장으로 나갔다. 특별한 계획도, 목표도 없었다. 단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무언가를 담고 싶었다. 광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얼굴들이 나를 맞이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다른 마음으로 그 자리에 모였겠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에 피켓을 들고 있었다. 종이에 적힌 구호는 날카롭고 절박했다.

"탄핵이 평화다", "정적제거 국민억압", "침묵은 동조다"—짧지만 강한 문장들이 피켓 위에 새겨져 있었다. 피켓을 들고 있는 그들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퍼져나갔고, 군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음정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울림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조용히 손을 흔들며 박자를 맞췄다. 목소리는 하나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군중 사이에서 하나둘 켜진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사람들은 손에 꼭 쥔 응원봉을 흔들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불빛이 흔들렸지만, 꺼질 염려는 없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빛나며 광장 전체를 물들였다. 각각의 작은 빛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듯했지만, 함께 모이니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카메라를 들고 이 모든 얼굴들을 바라봤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그들의 표정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떤 얼굴에는 분노가, 어떤 얼굴에는 슬픔이, 또 어떤 얼굴에는 희망이 비쳤다. 그들의 눈빛을 마주하며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왜 여기에 있을까?"
어떤 이들은 정의를 위해,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이들은 단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이 자리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한 건 그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나는 연대라는 것이 거창한 구호나 거대한 집회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연대는 사실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 침묵 속에서도 함께하는 마음.
연대는 피켓을 드는 손짓에서, 촛불을 지키는 손바닥에서, 그리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서 피어난다. 그건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고 그들의 얼굴을 담으면서 나 자신에게도 묻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피사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점점 내 안으로 향했다. 지금 내가 찍고 있는 이 순간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내 마음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사진은 단순히 빛을 담는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다. 사진은 감정을 담는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때로는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보여준다. 피사체의 슬픔, 분노, 희망, 그리고 그날의 공기와 온기까지.
나는 계속해서 질문하고 싶다.
"우리는 정말 함께하고 있는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가?"

광장에서 만난 얼굴들은 내게 말해줬다. 우리가 함께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으며, 그것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광장의 시간은 단순한 집회나 모임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연대의 얼굴들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날 이후, 나는 광장에 나갈 때마다 단순히 사람들의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을 포착하려고 한다. 사진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기록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창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그 꿈을 위해, 나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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