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uck cluck, 치킨게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by 슴도치

남자의 적의는 깊고 집요했다. 그는 차 안에서 소리를 치고 창문을 때렸다. 하지만 그 좁은 세계에서 돌아오는 거라곤 씩씩-거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위로받고 싶었지만 복수를 하고 싶었다. 아니 복수가 위로일 수도 있었다. 아니, 아니다. 단순히 세수를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남자는 손수건으로 땀을 연신 닦으면서 어두운 거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기원을 떠올려보았다. 자궁 안도 이렇게 어두웠겠지. 그래도 그때는 온전한 내 편이 있었을 때였다. 남자는 이 자동차도 자궁이었으면. 하는 맹랑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실히 혼자였고 그 적막함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김 서린 차창에 써놓은 남자의 이름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졌다. 마침내 저편에서 남자의 차와 똑같은 차 한 대가 나타났다. 전조등이 남자의 차를 비추었고, 남자도 마주 전조등을 켰다. 불빛이 몽둥이처럼 남자의 눈을 때렸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남자는 깊고 집요하게 가속페달을 밟았다. 밟고 밟고 밟았다. 타이어가 산고産苦의 비명처럼 울었고, 그는 태어날 수 있길 바랐다.








삶과 죽음의 양면성


분노에 사로잡힌 행동은 언제나 후회로 이어진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사람들은 “3초만 참아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3초는 어쩐지 지나치게 길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3초는 유예가 아니라, 이미 폭발을 향해 카운트다운하는 시간일 수 있다. 그래서 폭발의 반경 안에는 늘 내가 들어가고, 어쩌면 나 혼자만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부서져야만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자기 파괴적인 행동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처럼 보인다. 부서지고 상처 입는 행위가 곧 자신을 다시 봉합하는 의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땅에 쓰러졌다가도 기어코 몸을 일으킨다. 타인의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그 미련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폭력의 흔적은 언제나 오래 남는다. 그러나 더 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쪽이다. 보이는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잊히지만, 보이지 않는 상처는 은밀히, 비극적으로 오래 머문다.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상처에 휘둘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는 바다의 날씨처럼 설명 불가능한 힘에 가깝다.


치킨게임은 단순히 두 대의 자동차가 마주 달려드는 장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선택의 드라마일지 모른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우리는 “3초를 셀 것인가, 아니면 밟을 것인가”의 기로에 선다. 그 순간의 결정을 통해 어떤 이는 무너지고, 또 어떤 이는 기어코 다시 태어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밟는 선택을 한 이들조차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멸을 향한 돌진 속에서도 그들은 끝내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폭력은 인간의 민낯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만큼 마음을 감추게 만든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희망을 붙잡는다.


“Cluck Cluck.” 닭이 울음소리를 내며 겁쟁이라는 이름을 얻었듯, 우리 또한 매 순간 겁을 먹고, 동시에 맞서는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치킨게임은 생존과 파멸의 경계에서 우리가 반복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 속에서 인간은 끝내, 자신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절망은 놓는 힘이고 희망은 붙잡는 힘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붙잡는 힘이 더 센 법이다. 희망은 믿어도 된다.



keyword
수, 일 연재
이전 19화깻잎밭에서, 세 번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