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엄에 도착하다.
내가 묵은 호스텔은 100년도 넘은 주택을 개조한 3층 건물이었다. 빨간색 낮은 문을 밀고 들어서면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작은 마당이 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창문 옆에 소파와 텔레비전이 있는 거실이 보이는 곳, 영국의 가정집에 들어온 듯 아늑한 집이었다.
“며칠 있을 거예요?”
“2주? 3주? 아직 모르겠어요.”
나는 우선 주말까지의 숙박비만 치르곤 일정이 바뀌면 바로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장거리 이동으로 몸은 녹초였지만 막상 짐을 풀고 나니 불안함을 넘어 두려움이 엄습했다. 영국 중부에 덩그러니 떨어진 막막한 일정이 그제야 실감 난 것이다. 바닥난 체력에 더 심난한 기분인가 싶어 든든한 저녁으로 배를 채우자 다행히 불안함도 느긋함으로 가라앉았다. ‘시간을 보내자. 혹시 내일은 농장들에서 답장이 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런 마음에 그날은 바로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나는 삐거덕거리는 이층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휴대폰만 주시하고 있었다. 메일이 안 왔다. 보낸 지 사흘째인데 이미 콜스턴바셋에서는 방문을 불허하는 답장이 와서 남은 건 크롭웰비숍뿐인데, 답장조차 없으니 더 심란했다. 이곳마저 스틸턴 치즈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 읍소라도 해야 하나, 고민이 깊던 아침이었다. 내가 묵고 있는 방은 2층에 있는 4인실이었다. 100여 년 된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터라 좁고 가파른 나무 계단만 오르락내리락하며 이메일을 기다린 지 몇 시간째, 혹시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답장이 와 있었다. 스팸메일함에 멀쩡히!
친애하는 민희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크롭웰비숍 크리머리에 방문하는 걸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 마을에 머물 숙소도 알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틸턴 치즈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줄 수 있고, 당신은 사진 촬영은 물론 치즈 만드는 일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오는 것을 정말로 고대하고 있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방문해주면 좋겠습니다. 언제 올 수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 크롭웰비숍 대표 로빈 스케일 -
메일은 심지어 한 통이 아니었다. 내가 크롭웰비숍에 메일을 두 통 보냈듯이, 로빈의 답장 역시 두 통이 와 있었다. 너무도 호의적인 메일에 혹시 내가 잘못 이해했나 싶어 몇 번이고 꼼꼼히 읽어봤지만 어디에도 ‘NO’라는 단어는 없었다. 이를 어쩌나 감동이 감당이 안 됐다. 다음 날엔 로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 다시 한번 물었고,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다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농장에 정말로 2주 동안이나 가도 되는지 재차 물었다.
“우리는 소는 키우지 않으니 농장이 아닌 일반 크리머리 Creamery입니다. 물론 머물고 싶은 만큼 충분히 있어도 됩니다.”
당시 나는 농장 Farm이라는 단어를 소를 키우는 농장뿐 아니라 수작업으로 치즈를 만드는 전통농가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로마주리Fromagerie, 스위스에서는 케제라이 Käserie라는 단어로 치즈 만드는 곳을 표현했다. 소규모든 대규모든 관계없었고 젖소 농장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 아니어도 모두 같은 명칭을 썼다. 단, 모두 수작업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영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크롭웰비숍은 대규모이며 소를 키우지 않지만 치즈 공장 Cheese Factory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수작업으로 치즈를 만드는 곳이어서 산업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영국에서는 대규모로 유제품을 제조하는 곳을 ‘크리머리 Creamery’라 한다. 우유에서 추출한 크림 cream을 이용해 유제품을 만들거나 치즈 만드는 곳을 의미하는데, 프랑스나 스위스처럼 치즈제조에만 쓰는 한정적인 단어는 아니다. 때문에 크리머리라고 쓰여 있는 곳은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고, 크림치즈를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우유를 이용해 유제품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곳으로 데어리 Dairy가 있다. 치즈, 발효 요구르트, 우유, 달걀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 말이다. 크리머리와 데어리는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대규모 작업장을 주로 크리머리라고 한단다. 이와 달리 젖소 농장을 운영하며 직접 짠 우유로 치즈를 만드는 곳은 팜 데어리 Farm Dairy라고 한다.
크롭웰비숍에 첫발을 들인 날은 호스텔에서 주말을 보낸 뒤의 화요일이었다. 노팅엄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를 가서야 도착한 그곳은 아담한 주택들만 늘어선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분명 맞는 정류장에 내렸음에도 마을이 너무 한적해 덩그러니 혼자 떨어진 느낌이었다. 길을 물어볼 사람조차 없어 헤매지나 않을까 걱정했건만 크롭웰비숍의 입구는 다행히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크리머리를 알리는 연노랑의 기다란 간판을 지나 붉은 지붕이 덮인 하얀색의 낮은 건물들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흐드러지게 핀 보라색 라벤더 꽃 주위로 털이 복슬복슬한 호박벌들이 날아다니는 마당에 다다르자 누군가가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Are you Minhee?”
드디어 나를 반기는 사람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