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노란 꽃 21화

이중 주차

by 문창승

각진 테두리 높은 차체를 지닌

새하얀 SUV 한 대

내 차의 앞을 수직으로 가로막고 있다


불평 가득한 혼잣말 읊조리며

남기어진 연락처로 전화를 걸고

저기서 한 명의 여성이 뛰어 다가온다


그 순간, 시야를 몽땅 사로잡은 기적의 출현

아득한 우주가 실처럼 풀어져 찰랑거리고

인접한 두 개의 블랙홀이 나란히 나를 응시하며

물리 법칙을 가뿐히 무시한다


분홍빛 돌고래 두 마리가 위아래로 포개어진 채

들썩거리며 사람의 언어를 전한다

죄송해요. 빨리 뺄게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울고 갈

마름과 풍만 사이 완벽한 중용의 덕 실천하는

육체가 서둘러 기체에 탑승한다


금세 공간은 비워지고 내 차는

얼마든지 나갈 수 있게 되었어도 나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온몸의 피가 몇 배는 빨리 도는 기분

사지가 터질 듯 끓어오르는 느낌


나는 화가 난 게 틀림없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기막힌 이중 주차의 심술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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