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이 Sep 22. 2024

어느 날의 ​발렌타인데이

겨우 이게 우리의 최선이면 어떡하지?

우리의 발렌타인데이는 조용히 지나갔다. 


남편은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장미꽃을 사 왔고, 우리는 카드를 교환했다. 나는 선물은 기프티콘이나 상품권을 주고받는 게 편한데, 남편은 편지나 카드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매번 기념일이나 생일에 카드 하나를 정성스레 고르고 그 안에 손글씨로 마음을 써준다. 나는 편지 받는 건 정말 좋아하는데 써주는 게 아직도 어색 어색... 게다가 이날은 내가 카드를 못써가지고 ㅠㅠ 남편이 화장실 간 사이 후다닥 써서 줬다. 그렇게 잔잔하게 일상처럼 지나갔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조용히 지나갔다. 


나는 원래 불평불만이 많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 장미꽃 안 좋아하는데... 저녁에 외식이라도 하지... 데이트라도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비싼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 내가 실제로 했던 말들. 남편이 아무리 본인 나름으로 노력을 해도 내 눈에 차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니, 지금 남편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사실 남편은 똑같다. 하지만 옛날에는 불만이었을 남편의 행동들도 지금은 고마움이 먼저 느껴졌다. 그래, 이게 당신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구나. 이게 당신의 최선이고, 나에게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있구나. 그 사실을 인정하니 이해가 된다. 그 사실을 인정하니 남편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된다.


내가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내가 남편에게 사랑받을 준비가 되었구나. 

그래서 행복했다.




며칠 전,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힘들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문자 했는데 남편은 상황이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답장해서 역시 별 도움 안 되는 인간이라고 치부했었더랬다. 


그런데 남편이 퇴근시간에 맞춰 전화해서 자기 집에 일찍 왔으면 좋겠냐고 물어봤다. 아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웬일로 다정다감해진 남편이라니, 아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렇다. 이 남편은 내가 작년 3월 교통사고가 나서 소방차 오고 경찰차 오고 구급차 오고 난리부르스가 났어도 자.느.라. 전화를 안 받은 인간이다.


그날 밤 남편은 회사에서 문자 길게 하면 방해될까 봐 간략하게 답장했다고, 자기가 위로해주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 전화해서 물어봤다고 한다. 문자에는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안 쓰여있어서, 혹시나 나에게 큰일이 난 건 아닌지 속으로 엄청 걱정했었다고 (우리 사무실에 2주 동안 구급차 3번 출동함). 사무실 사정이 안 좋아진 건 안타깝지만 나에게 큰일이 난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해줬다.




남편이 이렇게 속 얘기를 해주면 좋다. 

남편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행동했었구나,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남편이 지금 나에게 관심 없어서 문자를 짧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기억할 수 있게 되니까.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다른 것이다. 


나는 즉각적인 반응을 원하는데, 남편은 태생이 느릿느릿 천천히 여유가 넘친다. 위로를 해주고 싶으면 그냥 문자로 해줘도 되는데, 아니면 회사라도 전화를 해줘도 되는데, 자기만의 배려가 넘친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남편의 논리가 말도 안 된다며 이해할 수 없다며 남편과 죽기 살기로 싸웠을 때도 있었다.


나도 많이 변했다. 


우리가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8년인데...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그 아기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우리도 뭔가 성장은 했겠지. 우리도 뭔가 변화는 있어야지. 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정말 수없이 많은 실망과 타협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불평불만이 많았었지만, 진짜 어느 순간순간 예기치 않게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가 온다. 내가 의식적으로 행복하기 위해 뭔가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정말 뜬금없이 행복하다. 가만히 있다가 남편을 떠오르면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고마움을 느끼게 될 때도 있다.







<외국인 남편 덕분에 배운 자존감 대화법> 도서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8414149

<외국인 남편 덕분에 배운 자존감 대화법> 클래스

https://class101.net/ko/products/DCNO3sPxKUBstRcB0ui9

<남편이 미워질 때 보는 책>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4744364


이전 12화 호구 남편, 각성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