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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꽃 향기 Nov 20. 2024

나는 어리보기지만 슈퍼 그랜마

남편은 8차 항암을 위해 입원했다.  


그간 잘 먹지도 못했고 운동은 꿈도 못 꾸었는데 혈액검사를 통과한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2박 3일 동안 몇 가지 항암제가 릴레이로 남편 암을 공략하고, 암과 항암제의 싸움터인 몸과 정신을 잘 지켜내는 게 남편의 임무다. 그때만 해도 남편은 혼자 병실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고, 아내 잔소리에서 해방되는 것도 신이 나는지 짐이 정리되는 게 무섭게 어서 가라고 날 쫓았다. 간호통합서비스를 시행하는 병동이라 남편만 두고 오는 내 마음도 크게 부담이 없었다.

      

유난히 비염이 심한 날, 밀린 도로를 운전해 가서 남편의 눈치를 봐가며 입원 수속을 밟고, 병실에 올라가 짐을 정리하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심중을 먼저 헤아리다 보니 그럴까 남편에게 나는 항상 乙이다. 내가 아프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어리보기가 되어버리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맥이 빠진 상태로 다시 한 시간 반을 운전해서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까. 또 학원에 있는 손자를 픽업해 저녁을 지어 먹일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방법이 없었다. 전날에도 휴가를 낸 사위에게 또 그러라고 할 수 없고, 회사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오밤중에나 퇴근해 오는 딸에게 당장 주저앉을 지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깨에 피곤을 잔뜩 매달고 집에 도착하니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웬일로 집에 잘 갔는지 안부를 묻나 했더니 가져왔으리라 믿었던 묵은지볶음이 없다고 했다. 그랬다. 최근 그나마 잘 먹기에 병원에 가져가려고 따로 준비해 놓고 까먹었다.

  

  “아유, 그러네. 내일 가져다줄게.”

  “힘들게 뭣하러... ”

  “아냐. 묵은지라도 있어야 밥을 먹지. 가져다줄게요.”

  “그럼 백화점에 들러 양념게장 좀 사 와.”


힘들게 뭣하러 오느냐고 하더니 안 갈 수 없게 숙제까지 내주었다. 아니 먹고 싶은 것을 말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백화점까지 갈 시간은 없으니 일단 쿠팡을 뒤졌다. 로켓배송하는 양념게장은 없고 게살만 발라서 양념해 놓은 건 있었다. 그중 후기가 좋은 걸 골라 결제 버튼을 눌렀다. 양념게장 검색하다 손자 끝나는 시간에 맞추기가 빠듯해졌다. 소파에 엉덩이 붙여보지도 못하고 집을 나섰다.


운전 실력 없으면 들어갈 생각조차 못 하게 설계된 학원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주춤주춤 차를 몰아 들어갔다. 다행으로 마침 빠져나가는 차가 있었다. 얼른 내 차 꽁무니를 벽 가까이 들이밀었다. 건물 5층 학원 앞에 도착하니 나를 발견한 손자가 활짝 웃으며 번쩍 손을 들었다. 긴장의 연속이던 심장이 수천 개의 하트무늬를 그리며 반짝였다. 보관함에 저장해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재생하고 싶은 컷이다.    

  

어리보기 할머니가 겁먹지 않도록 빠져나오는 길을 잘 안내하는 꼬맹이 가이드를 앞세우고 햄버거 집으로 갔다. 대충 차려주는 밥보다 영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자위를 하면서. 그러지 않아도 햄버거가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자기 맘을 알았냐고 눙치는 놈. 할아버지가 눕는 바람에 스스로 자라는 법을 터득한 듯 할머니 손을 놓고 점프해 버린 아이. 그 아이가 햄버거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꿀이 떨어지고 있었으리라.

     

이제 겨우 2학년 짜리 손자 놈과 나는 꿍짝이 잘 맞는다. 축구를 했는지 얼굴이며 옷이며 꾀죄죄했다. 물티슈를 자꾸 들이대니 또 눙치는 아이.

 

  “축구할 때 몸 사리면 더 다친다고요오. 좀 더러워도 이해하숑 My Super Grandma!”


모르는 사람의 할머니 호칭에 혼자 발끈했던 거 맞나 싶게 이 아이의 할머니인 게 얼마나 좋은지. 손자와 마주 앉은 그 잠깐의 기쁨이 힘에 겨웠던 하루를 상쇄할 만큼 크고 넘쳤다. 그럼 됐다.  




이튿날 아침. 눈 뜨자마자 문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순살양념꽃게장을 안으로 모셔와 맛을 보았다. 광고에 또 당했다. 리뷰도 믿을 게 못 된다. 급하게 쿠팡을 뒤졌다. 냉동 절단 꽃게를 주문했다. 번거로워도 내가 양념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전엔 손님 초대하면 으레 만들어 놓던 건데 잊고 있었다. 자칭 최고 레시피가 많으니 잘 응용하면 먹을 만할 것이다. 출근 러시아워만 지나면 바로 달려가서 묵은지찜과 맛은 그냥 그렇지만 명인의 꼬리표를 달고 출시되었다는 순살양념꽃게장을 들이밀고 와야겠다.


퇴원해 집에 오는 날, 마누라표 양념꽃게장 맛에 남편 입이 함박만 하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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