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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痕29. 가을을 슬프게 하는 것들

"어떤 날" 조동진

by 이치혜

진한 비가 그치더니 이틀 사이에 가을이 왔다. 얇게 입고 나선 출근길에 옹송그렸다. 차창 밖 하늘이 맑았는데도 어쩐지 스산해 보였다.

가을이 오면 나는 슬퍼진다. 낙엽 때문도 아니고, 날씨가 서늘해서도 아니다. 가을이라는 계절 자체가 슬퍼서인가. 어쩌면 여름의 어느 끝자락부터 슬픈 가을을 지레 예감하며 지냈는지도 모른다.

저녁 여섯 시, 벌써 어둠이 내린다. 두어 달 전만 해도 활기로 환했던 그 시간이 이제는 빠르게 도시의 그림자로 물들어 간다. 해가 짧아지면 나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세로토닌이 줄어들고 멜라토닌이 늘어나며 활기가 떨어지고 우울이 찾아온다. 나는 결국 호르몬에 좌지우지되는 한낱 동물일 뿐이다. 이성을 헛헛하게 만드는 생물학적 한계 앞에서 나는 무기력하다.

어둠이 길어지면 사색의 시간도 길어진다.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을수록 사람은 외로워지는 법인가. 신독(愼獨)이라 배웠으나 실존은 조잡하고 부박할 뿐이다. 퇴근길에 차갑게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들은 마치 작은 위로처럼 반짝이지만, 그 위로조차 본질적으로는 쓸쓸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 가을 옷가지가 나는 슬프다. 카디건 주머니에서 구겨진 메모 한 장이 나온다. 메모에 적힌 글자에 담긴 그날의 기억이 그윽하다. 그때 이랬구나.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옷에 밴 옷장의 냄새는 작년 가을의 냄새다. 그사이 많은 것이 흘러갔다. 아니, 변한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시간이 흘렀을 뿐, 나의 고독은 작년, 재작년의 가을과 여전하다.

마트의 과일코너에 수북이 진열된 온갖 과일.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 해의 수확을 자랑한다. 나는 무엇을 거두었던가. 돌아보면 만족스러운 것이 없다. 가을을 준비하며 모든 것이 살을 찌우고 향을 더할 때 나는 오히려 쇠락하였다. 회한의 맛은 늘 진하게 쓰다.

가을은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기에 어정쩡한 계절이다. 일 년의 대부분이 이미 지나갔다. 봄도 아니고 새해도 아닌 이 시점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왠지 멋쩍고 늦은 느낌을 준다. 저물어가는 계절에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퇴락한 집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처럼 공허하다. 그렇다고 그저 시간을 보내자니 그럴 수도 없다. 과장된 진퇴양난 앞에서 가을은 쓸쓸하다.

새벽길에 마주친 길고양이에게서 생존의 슬픔을 본다. 여윈 몸, 까칠한 털, 후다닥 저만치 도망가서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제 영역을 침범한 나를 관찰한다. 애잔하다. 다가오는 겨울을 저 작은 생명은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그저 지나칠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추위를 홀로 견뎌야 한다.

어두운 새벽, 거의 매일 이 시간쯤 마주치는, 기역자에 가까운 등이 아슬아슬한 할머니가 파지를 줍는다. 느린 걸음, 삐걱거리는 낡은 리어카와 함께 골목길은 길고 고달프다. 청소노동자가 낙엽을 쓴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지만 그들의 하루는 이미 바쁘다. 나는 잰걸음으로 그저 지나친다. 문득 미안해진다. 무엇이 미안한지 정확히 짚을 수 없지만, 막연한 미안함에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하루를 지고 산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산사의 종소리는 가을을 슬프게 한다. 가을 새벽의 종소리는 유난히 길고 멀리 퍼진다. 그 여운이 오래도록 가슴을 파고든다. 무엇인가 끝나가는 소리 같다. 무엇인가를 보내는 소리 같다. 종소리는 허공에 울려 퍼지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울려 퍼지다 사라진다, 허공에.

SNS에는 단풍 사진들이 넘친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계절을 빛낸다. 단풍을 보며 나는 쓸쓸해한다. 예쁘다는 생각보다 지고 난 숲길의 서걱거림을 먼저 떠올린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슬프다. 절정은 어쩌면 쇠락의 동의어이다. 가장 붉게 물든 단풍잎은 곧 떨어질 것이고,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도 이미 지나갔다. 책받침만 한 가로수 잎이 초속 5미터로 너울거리며 떨어졌다.

녹차 팩을 담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싼다. 작은 온기의 위로가 고맙다. 그러면서 놀랍다. 이런 사소한 것에 의지하며 나의 하루하루가 쌓이고 버텨진다는 것이. 한편으로 조심스럽고 슬프다. 이러한 수많은 작은 것이 너무나도 쉽게 혹은 홀연히 내게서 떠나갈 수 있다는 것이.


가을은 만남보다 헤어짐이 어울린다.

"送遠(송원)" — 먼 길 떠나는 이를 보내며. 두보.

離筵罷卻酒,別客動歸心。

出戶重相顧,含情自不禁。

이별의 잔치, 술은 다 비웠으나

떠나는 이의 마음은 이미 고향으로 향한다.

문을 나서며 다시 돌아보니,

그 정에 눈물이 절로 흐른다.


이별의 애틋함은 가을을 슬프게 한다.


보고 싶은 친구가 떠올랐다. 그저 그리움에 그칠 수밖에 없는 가을밤에 나는 슬프다.

sns를 오염시키는 억지와 무도와 거짓에 소심하게 마음을 끓일 뿐인 내 모습이 나는 슬프다.

길거리에서 가족들과 뜻밖에 마주치면 왠지 애잔하다. 내가 아들일 때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미안함과 못난이로서의 부끄러음을 짐짓 무뚝뚝함으로 숨기고, 돌아서며 나는 슬프다.

가을의 생일은 서글프다. 거울 속에서 어느덧 늘어난 흰머리카락과 탄력을 잃어가는 거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얼굴 뒤에 놓쳐버린 시간과 이루지 못한 꿈과, 허랑하게 저버린 기대와 응원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 그럼에도 여직 욕망 속에서 아둥바둥해야만 하는 가을은 슬프다.

슬픔을 느낀다는 것을 아직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무감각한 것보다야 슬픔이 낫겠지. 가을이 슬픈 것은 내가 계절을 느끼고, 추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욕심도 지닌 채.

이 가을도 나는 슬프다. 그 슬픔이 조금은 좋다. 바닥에 가라앉은 것 같은 마음으로 허우적대다 보면 짧은 가을은 어느새 지나가는 것이다. 마치 잘 타버린 모닥불처럼 마음은 비워지고. 그 다음에는 또 뭔가 오겠지.

가을은 슬프다. 슬픔이 나를 조금 깊게 만든다.




https://youtu.be/1l5CUXrB7fU?si=Uc9ggHpTyAMcZx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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