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는 타인이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 누구에게나 자녀란 축복이요, 행복의 원천이자,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다.
자녀는 왜 타인이어야마나 하는가?
-존재
-일정한 거리
-관찰
-윤리
-교육
내 자녀가 나에게 타인인 이유, 그리고 타인이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요소로 설명하고자 한다.
존재
존재론적으로 나와 자녀는 동일인일 수 없다. 한 공간에 많은 시간을 공존하게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자녀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전적 형질을 받았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뿐 이것은 나와 같아야 한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의 타인성을 부정하면 재앙의 문을 스스로 열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녀는 독립성과 주체성을 잃게 될 것이고, 살아갈 만한 동력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데 취약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보호하고, 사랑하며, 가르치되 자녀의 독립된 공간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섣불리 타인의 공간에 침범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이러한 명령과 강요는 타인성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는 어려운 문제다.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에서부터가 선을 넘는 것인가? 만약 자녀를 타인으로 바라본다면 이 문제는 대부분 풀린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임과 동시에 타인이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특별히 감정의 맥락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철저히 타인으로서 존재한다. 아이는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독립된 존재다. 자녀 내면의 두려움, 불안, 공포, 슬픔, 기쁨, 행복감, 성취감 같은 것들은 부모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인지함으로써 자녀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최악의 부로란, 자녀의 감정을 외면하고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부모다.
거리
자녀가 타인이라면, 일정한 거리가 발생하리라. 자녀가 나의 노예나 가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닌 타인이라면, 마땅히 나와 자녀 사이에는 거리가 생긴다. 노예나 가축은 주인으로부터 거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노예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만한 작은 공간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존재다. 노예에겐 독립성이 없다. 노예는 감정이 거세된 존재다.
자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부모라면, 자녀를 가르치고 보호하되 지배하려 하지는 않으리라. 엄격한 스승으로서 자녀를 안내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녀 스스로 존중받는 느낌을 줄 것이다. 이러한 거리가 무너지면, 자녀는 자신이 노예가 아닌가, 가축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자녀와 부모 간의 적절한 거리는 이 두 관계를 우주에서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무엇으로 만든다.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러한 거리는 각각 독립된 존재로서 응원하고 의리를 지키는 관계로 발전된다.
관찰과 윤리
관찰하지 않는 부모, 관찰하려 하지 않는 부모는 성급하게 행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부모는 스스로 거리를 무너뜨리고 아이의 독립된 공간 속에 들어가 아이의 사유물을 파괴한다. 그저 지켜보는 것, 아이의 모습과 의지, 기호 등을 바라보는 것, 아이가 무엇을 보는지 유심히 관찰하는 것만으로 부모는 아이를 이해하게 된다. 나와 철저히 이질적인 타인이란 대전제 아래에서, 부모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대부분 관찰에서 기인한다. 관찰하지 않는 부모는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아이의 안내자가 아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라는 의미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어떤 스승도 일면식도 없는 자를 제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자녀의 타인성이란 부모로서의 윤리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아이를 향한 폭력이란 다양하게 나타난다. 심리적, 정서적 폭력, 신체적 폭력 등은 모두 윤리적 문제다. 내 아이에 대한 윤리란 타인에 대한 윤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타인을 윤리적으로 대한다고 말할 때 떠올리는 것들, 즉 신체적, 감정적 제한, 법과 문화, 태도의 문제는 나의 자녀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오늘날 부모들의 학원 뺑뺑이, 선을 넘는 학습 강요는 과거 산업화 시절 영국에서 행해진 아동 노동 강요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노동을 강요할 수 없듯이, 학습도 강요되어서는 곤란하다. 학습은 무조건 선이란 믿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어떤 성인을 방에 가둬놓고 하루 중 12시간, 13시간, 14시간을 학습하도록 강제한다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옳을까? 이러한 가정은 나의 자녀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교육
결론적으로, 자녀에 대한 교육 문제 해법은 자녀의 타인성 위에 세워져야 한다. 문제를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하려는 단순함은 그 자체로 망상이다. 인간의 성장이란 숙제를 오직 한 가지 방편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것 자체로 무지의 결정판이다. 우주의 다양성을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인간을 성장시키는 방법 역시 다양하게 추구되어야 한다.
학습을 단지 성적만으로 바라보는 부모는, 자녀를 무지와 망상으로 가득 찬 오만하고 우울한 존재로 이끈다. 이들은 태어나서부터 20년 간 갇힌 상태로 기술을 훈련받은 서커스단의 어린 광대와 비슷하다. 이 어린 광대는 스스로 익힌 기술이 마치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식인 양 착각하지만 서커스단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성적 기계가 의사나 검사, 관료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단지 특정한 기술을 익힌 광대일 뿐이다.
부모는 아이를 우주와 이어주는 존재다. 이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훌륭한 부모의 모습이다. 우주가 지니는 놀라움과 경이로움, 아름다움과 자유, 신성... , 부모는 이러한 것을 아이가 경험하고 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아이의 존재 자체가 우주의 일부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모는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없다. 내 생각에 교육이란 것 역시 이러한 안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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