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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도 목적이 있을까?

8살의 머리 감기

by 윤슬기

"아빠, 나 혼자 머리 감아봐도 돼?"


샤워부스 안에서 바가지로 물놀이하던 8살 빛이가 나름의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어.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봐."


여기서 그쳤으면 딱 좋았을 것을.


"잘못 감으면 나중에 머리 가려우니까, 샴푸로 구석구석 잘 감고, 손톱으로 머리 긁으면 두피에 상처 나니까 여기 손 끝에 지문 있는 부분 있지? 여기로 문질문질하고, 그렇다고 또 너무 세게 하지는 말고. 그리고 헹궈낼 때 더 깨끗이 잘해야 되는 것도 알지? 거품 미끌미끌 남아 있고 그러면 안 감은 것만 못한다? 다 감고 나면 아빠가 한 번 더 확인하는 건 괜찮지?"


와. 딸이 머리 한번 감아보겠다는데 뭔 잔소리가 그리 많은지. 돌아보니 진짜 별로다. 빛이는 "좋아."라는 짧은 한마디만 남기고 혼자 머리를 감기 시작한다.


"아빠, 다했어!"


잠시 후 가서 확인해 보니 거품 하나 없이 진짜 깨끗하다. 머리에서 냄새도 전혀 안 난다. 앞서 내가 한 말들이 무색해진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잘한다. 잔소리 따윈 시켜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 '잔소리'하는 것보다, 잘한 부분을 찾아 '칭찬'해주면 더 잘한다.


어쨌든, 머리 한 번 감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앞으로 큰 일 하나 줄었네? 아싸.




"하늘아, 우리 얼른 들어가서 하늘이가 좋아하는 피자 만들어 먹을까?

"아니."


유치원 끝나고 나온 5살 둘째가 놀이터에서 노느라 정신이 없다.


"하늘아, 벌써 해가 지고 있어. 빨리 들어가자. 자꾸 안 들어가면 아빠 혼자 그냥 간다?"

"카드키만 주고 가."


야심 차게 협박해 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말하고 1초 만에 후회 중.


"너 혼자 집까지 찾아올 수 있어?"

"이쪽으로 쭈욱 가면 되는 거 아냐?"


맞다.


불행하게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 집 앞 놀이터라면 모를까. 오늘 찾은 놀이터는 아이 걸음으로 15분 거리에, 횡단보도를 무려 네 개나 건너야 한다.


회유와 협박에 모두 실패한 아빠의 남은 선택지는 '기다림' 뿐이다. 5살과의 머리싸움에서 패배한 분을 삭이며 기다리는 아빠의 속을 끝까지 긁는 하늘이.


"카드키 빨리 주라니까?"


아오.




'육아의 목적은 무엇일까?'


'요즘육아'를 말하는 전문가들은 이 질문을 잘 기억하라 조언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흔히 '독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독립시킬 것인가?'


부모들은 이를 위해 이것저것 시켜보며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내가 느끼는 아이들은 이미 매우 '독립적'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째가 혼자 머리를 감으려 하고, 유치원생인 둘째가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들어오겠다는 것처럼. 심지어 돌배기 막내도 이유식을 혼자 먹겠다며 숟가락을 빼앗는다.


아이들은 세 살 때부터 자신의 옷은 자기가 골라서 입고, 신발과 양말도 스스로 신어 왔다. 물론 아이들의 기상천외한 패션감각에 눈을 감아야 할 때도 많았고, 겨울에 슬리퍼를 신거나 한여름에 어그부츠를 신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육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핵심은 '기다림'이다. 마음껏 실수하며 스스로 느낄 때까지. 아이가 스스로 잘하기를 기대하기 전에, 부모가 아이로부터 먼저 독립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아이도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있다.




첫째는 이제 잠도 혼자 자겠다며 자기 방에 따로 이불을 깔아달라고 한다.(원래는 한 방에서 다 같이 잔다.)




근데 이럴 거면 이불은 왜 깔아달라고 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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