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달콤한 꿈을 꾸고 싶다.
한 번도 생의 비애를 맛보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이 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면 그제야 꿈인 줄 알까.
가끔씩 꿈을 꾼다. 넓은 마당에서 바람을 맞으며 왈츠처럼 움직였던 색색의 옷 빨래들. 시골의 풍경은 으레 지루해서 변해가는 계절의 흐름을 눈치채기 쉽다. 그곳은 꿈속에서도 맑고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먼지처럼, 불면 꺼질 것 같은 불꽃처럼, 마치 나라는 존재가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밖에 회색빛 땅거미가 묽은 물감을 칠하듯 내리면 나에게 유일한 장난감은 텔레비전이었다. 아홉 살 무렵에는 몇 개 정도밖에 안 되는 TV채널 중 EBS에서 나오는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를 자주 시청했다. 밥 로스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면서 “어때요 참 쉽죠?“ 할 때마다 같이 그 말을 따라 했었다. “참 쉽죠?”
밥 로스 아저씨의 다정한 말투를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져서 아저씨의 작품 보다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 듣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둘 유화 덧칠로 완성된 밥 로스 아저씨의 그림을 보며 모든 그림이 다 같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고유 성품에 따라 그려지는 시선이 곧 작품으로 이어진다 싶었다.
어느 햇살 좋은 봄 날에는 대청마루에 앉아 담장 너머에 있는 초록색 느티나무를 그렸다. 팔레트에 잔뜩 물감을 짜 놓고 하얀 도화지에 밥 로스 아저씨처럼 물감을 덧칠했다. 비록 수채화 물감이었지만 그림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물감을 물로 섞고 기름으로 섞어도 나무의 형태는 변할리 없고 그림의 풍경 또한 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한참을 지나 우연히 밥 로스 아저씨 동영상을 보았다. 멀리 떠나간 사람일지라도 기나긴 시간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저씨의 다정했던 말투와 그림의 온기가 내 마음속 온전히 남아 있기에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빛이 입자가 아닌 것처럼, 형이상적인 자연 철학과 반대로 삶이라는 광대한 공간에서 대부분의 별들은 소멸하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생성된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사람을 대하기에는 삭막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푸념 섞인 말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