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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Jun 29. 2022

기다림에 대한 단상

설레고 즐거운 기다림을 만들기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에는 한 사람의 일생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지의 기다림이 등장한다. 인생살이에 계속되는 수많은 기다림은 이상하게도, 설렘보다는 먹먹하고 애잔하게 다가온다.




  '삶의 끈'을 상징하는 빨간 털실이 모든 장면에 콜라주 기법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그림책의 특징이다.   



  '기다림'이라는 말에는 초조함과 절박함, 불안함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태생적으로 서글픔을 담고 있는 말 같다. 오랜 시간 불편하고 힘겨운 인고의 과정이 수반되는 단어 같아서 버겁기도 하다.


  삶은 기다림의 과정이다. 삶의 단계마다 원하는 것을 매번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긴 기다림 끝에 느끼는 기쁨은 허망할만큼 짧은 순간이다. 만끽하기엔 너무나 짧은, 찰나의 기쁨 이후에는 또다른 기다림이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단계의 기다림을 향한 애달픈 시간은 하염없이 지속된다.


무언가를 향한 계속된 기,다,림...

기다림은 외롭고 두렵고 힘겹다.  

끝없는 기다림은 코카서스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간을 내주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같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2008년 두 언론사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선정된 황지우 시인의 작품이다. 오래 전 황지우 작가의 문학 강연에서 이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었다. 87년에 <영레이디>라는 중학생이 보는 하이틴 잡지에 이 시를 5분 만에 써서 기고했다고 한다. 당시 가수인 김세환 씨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이 시를 낭송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연인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으로 느껴져 특히 여성들의 반응이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지우 시인은 이 시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운 시'라며, 시를 창작하게 된 에피소드를 말했다. 87년에 민주화운동 관련하여 수배 중에 잠시 도피 생활을 하면서 '돈'을 갖다주기로 한 후배를 지방의 한 서점에서 애타게 기다리면서 후배가 오지 않아서 느꼈던 감정을 쓴 시라고 한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대상은 '사랑하는 여인'도 아니고, 실은 '돈'이었다고. 문학 강연에서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표면적인 기다림의 대상인 '후배가 갖다주기로 한 돈'의 이면에는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등  수많은 의미의 기다림을 내포하고 있으리라.

  이후 KBS의 <FM 클래식>이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또 한 번 이 시가 낭송되었는데, 진행자가 이 시를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날'에 어울리는 시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황지우 시인은 그 방송을 듣고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시집 <게 눈 속의 연꽃>(1990)에 시인이 덧붙인 '착어'에는 이렇게 써 있다.

  


  여러 유형의 기다림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쓰디쓴 커피같은 기다림'이 담긴 컵을 깨끗이 씻어 '달콤하고 향긋한 딸기라떼 같은 기다림'을 담아 보련다.

기다림에 설렘 두 스푼, 기대 한 스푼을 넣고 신나게 휘이, 저은 후 호로록 마셔야지.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저녁 약속 한 스푼,

음악을 들으며 누워서 보고 싶은 책을 읽는 여유로운 휴일의 하루 한 스푼,

소나무밭 아래에서 에메랄드빛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한적한 여행 한 스푼...  


즐거운 기다림을 일상의 곳곳에 배치해 두어 보물찾기하듯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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