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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알리바이

루스끌로바 124번지. 내가 사는 아파트 주소이다……

by 빅토리야

새벽 찬 바람 때문에 눈을 떴다. 내 아파트에는 두 개의 창이 있다. 하나는 주방 쪽에, 하나는 침대가 놓인 거실 겸 침실 쪽에 있다.

신문에 실린 사진상으로 봤을 때 내 침대가 놓여 있는 창문 아래에서 나타샤라는 여자가 살해를 당한 것이다.

일주일 전이면 나는 비자를 위해 잠시, 키르기스스탄에 갔던 시기였다. 5년 전에 러시아어 공부를 위해 입학한 대학에서 더 이상의 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난 6개월에 한 번은 다른 나라로 가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한국으로 다녀오면 가장 좋겠지만 비행깃값이 너무 비쌌고, 그래도 어쩌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나가면 나를 한심하게 보는 가족들의 시선이 힘들었다. 그래서 비자 여행지로 정한 곳이 바로 키르기스스탄이었다.

비행깃값도 싸고, 물가도 싸고, 한인 민박도 있어 오랜만에 한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비자를 받기 위해 딱! 삼 일을 이곳을 떠나 있었는데 그때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그날 이곳에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내가 여기에 있었더라면 살인현장을 봤을 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갑자기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이민 가방에서 겨울 코트를 꺼내 덮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러시아! 그러니까 이곳은 모스크바에서 2,555km 떨어진 ‘옴스크’라는 곳이다. 이곳에 온 이유는 모스크바의 물가를 감당할 수 없었고, 학업에 한계 또한 넘을 수 없어서였다. 학창 시절부터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남들이 잘하지 않는 것을 찾아서 그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겠다는 어설픈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러시아어였다.

대학 3년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 온 이곳 생활은 나의 어설픈 방법을 격려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혹독하게 몰아세웠다. 그래서 밀려 들어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모스크바에서 5년 남짓 배운 언어와 경험으로 옴스크에서 나는 지금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때론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곳의 자유로운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잠 못 드는 새벽엔 맥주가 최고지 ’

침대에서 일어나 유난히 큰 소리를 내는 낡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힘겹게 일하고 있는 모습이 꼭 나 같다!’

맥주는 미지근했다. 내일은……. 아니다! 오늘 집주인이 9시쯤 온다고 했으니 잊어버리지 않도록 돈을 봉투에 넣었다. 출출하다는 생각에 뭐든 먹고 싶었지만,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새벽 4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막심이 오늘은 일찍 나가는 걸까? 새벽에도 일을 시작한 걸까?’ 문소리와 함께 작지만 높고 경쾌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에 있는 외시경을 통해 밖을 봤다. 복도에는 불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두 소리로 여자의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막심의 집에서 나온 여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시간에 남의 집에서 나오는 여자라면 몸을 파는 여자겠지.’


순간, 순진하게만 보았던 막심이 다르게 느껴졌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일을 찾을 수 없어 인종차별이 심한 이곳이지만 일을 찾아 밀려온 막심. 밤낮 일을 해서 번 돈을 가족에게 꼬박꼬박 보내고 있는 막심.

그는 어려 보였지만 아내도 있고 두 아이도 있었다. 어느 날은 나를 찾아와 가족의 이름을 한글로 써 달라고 했었다. 자신도 드라마 대장금을 열 번도 더 봤다고 했다. 그때 막심은 나에게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줬었다. 막심과 같이 어려 보이는 아내와 귀여운 두 아이는 막심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둘은 떠나온 나라는 달랐지만, 타지에 살고 있는 외로운 이방인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공질감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우린 같은 처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가 못마땅했다. 난 적어도 한국에서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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