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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낡은 마을

막심에게로 향했다…

by 빅토리야

막심은 러시아로 일하러 온 우즈베키스탄사람이다.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얼추 20대 초반이지 않을까? 마른 체형에 160cm 정도의 키를 가진 막심은 아침 일찍 일을 나갔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가끔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줬다.

어제 그가 준 보르시를 담았던 그릇을 돌려주며 창틈을 막을 테이프도 빌리려 했다.

그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의 그릇 가장자리는 깨져있었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은 검정 이물질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더럽게 느껴졌다. 막심도 그의 그릇도.

'나는 간사한 놈이다! 먹을 때는 너무 맛있어 그릇까지도 먹을 태세였는데, 다 먹고 나니 보이는군.' 평소 막심의 손톱에 끼어있던 알 수 없는 검정 때가 생각나 속이 거북해졌다.

저녁 8시가 되려면 아직 3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복도 바닥에 버려진 신문을 주워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임시로 신문을 접어 가장 크게 벌어진 창문틀 틈에 끼워 넣었다. 한결 바람이 덜 들어왔다.

러시아는 중앙난방이다. 그래서 11월 중순이 되어야 아파트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난방을 넣어준다. 10월인 지금이 가장 애매하다. 비라도 오면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 온돌에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집주인은 나에게 너무 추우면 가스레인지를 켜고 있으라고 했다. 전기는 비싸고, 가스는 싸니, 전기를 쓰는 난방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국에서 전기장판이라도 하나 가져올 것을 후회됐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식탁 앞에 앉았다. 그냥 불만 켜두기 아까워 물을 담아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가스를 켜니 한결 따뜻해졌다.

집주인은 예전에 내 러시아 선생님의 먼 친척이다. 뚱뚱한 체구의 러시아 아줌마다.

말이 빠르고 늘 큰 원피스를 입고 다니며 굶은 웨이브 머리를 틀어 올렸다. 키는 170cm쯤 되고 큰 몸집의 그녀는 구소련 시절 빵 공장 관리자였다고 했다. 목소리는 우렁찼고 말할 때마다 크게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녀가 흔드는 팔에 맞으면 아프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름에 내내 입고 다니던 늘어진 원피스 사이로 보였던 처진 팔뚝 살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가 걷는 팔자걸음은 몸의 무게를 지탱하기 힘들다고 외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월세를 받으러 올 때마다 그녀는 작은 나의 아파트를 오랜 시간 살피고 갔다. 족히 50년은 된 이 작은 아파트를 그녀는 애지중지했다.

이제는 낡아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썩은 나무창틀, 벗겨진 페인트 벽, 그리고 잘 닫히지 않는 문까지도 그녀는 마치 구소련 때 받은 자랑스러운 훈장같이 여기는 것 같았다. 공산 시절, 그러니까 구소련 시절 나라에서 무상으로 배급받은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 월세는 연금만으로 살기에 빠듯한 그녀와 부모 잃은 손자의 생활비였다.


아파트를 검사할 때면 그녀는 교장 선생님이 된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눈을 내리깔고는 삐걱삐걱 소리 나는 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럴 때마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동자를 한 번만 굴려도 다 보고도 남을 작은 아파트를 그렇게 오랫동안 볼 수 있는 것도 재주다 싶었다.

내일 그녀가 월세를 받으러 오는 날이다. 그녀는 늘 월세를 받는 날은 잊지도 않고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내가 외출이라도 한 날은 그녀에게 있는 내 아파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 작은 식탁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의 살들은 내 작은 의자를 덮어 버리고 의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 온 그녀의 전화는 내일 꼭 집에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할 말이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월세를 올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까다로운 그녀의 조건들을 다 들어줄 작정이었다. 그녀가 월세를 더 올려 받는다면 난 이 거지 같은 아파트에서도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옆집에 사는 막심과 같이 살까?’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반반씩 월세를 내고 살면 막심도 좋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막심도 나도 러시아어가 짧으니 긴 대화를 할 필요도 없고,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에야 들어오는 그가 나를 귀찮게 할 일도 없었다. 이건 최후의 방법이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건조한 공기를 적셨다. 불을 줄이고 주전자에 물을 가득 더 부었다. 이미 말라버린 사과 반쪽이 옆에 있어 ‘먹을까?’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막심에게 주려 했던 빨갛고 싱싱한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물었다.

달고 상큼한 사과 맛이 입안 가득 춤을 췄다. 그 맛이 더러운 부엌에 앉아 있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입에 사과를 물고 있으니 달콤하고 향긋한 사과 향이 코로 들어왔다.

그리고 창문틀에 끼우고 남은 신문 한 장을 읽기 시작했다. 대충 읽어 내려가던 중 내 눈에 들어온 사진 한 장 때문에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사과즙과 내 침이 뒤섞여 신문 위로 뚝! 뚝! 떨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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