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러시아에 와서 처음 맛본 음식은 보르시(러시아 전통 수프)였다. 양파, 당근, 양배추, 감자, 토마토, 비트를 잘게 썰어 기름에 볶은 후, 쇠고기로 낸 육수를 부어 고기와 푹 끓여 내는 수프다.
비트에서 우려 나온 붉은색은 수프를 체리 빛으로 만들어버린다. 맛은 한국에 뭇국과 비슷하다. 붉은색 국물이라, 매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맛은 반전을 준다.
진한 국물은 배 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 뼛속까지 시린 추운 날에는 이것만 한 최고의 음식은 없다. 어느덧 이 수프가 타국에서 내 외로움을 달래 주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어제 먹고 남은 보르시를 다시 데워 딱딱해진 빵 한 조각을 떼어 국물에 적셔 먹기 시작했다. 달콤하고 깊은 맛이 어제보다 더 맛있었다. 현지인들 말이 보르시는 끓인 그 당일보다 다음 날이 더 맛있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그릇 바닥에 남겨진 채소까지 싹싹 먹어치웠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야 식탁 앞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뜨거운 수프를 먹을 때는 몰랐는데'
창문 틈을 막을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옆에 놓인 빈 그릇을 대충 행주로 닦았다. 그리고 남아 있던 빨간 사과 하나를 그릇에 담아 옆집에 사는 막심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