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늦게야 다시 잠든 나는 노크 소리에 짐을 깼다.
새벽 늦게야 다시 잠든 나는 노크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도 보지 않고 집주인이란 생각에 문을 열었다.
막심이었다. 밖에 나가는 길에 들른 것 같았다. 그는 비자를 받기 위해 고향 집에 2주 정도 다녀온다는 것이었다.
‘어제 만났을 땐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막심은 자신의 냉장고에 남아 있던 쉽게 상하는 채소와 과일 몇 가지를 봉투에 담아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데 하루에 한 번 물과 생선 통조림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의 집 열쇠를 받았다.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은 집에 고양이를 키우며 산다. 하지만 막심까지 키우고 있는지는 몰랐다.
열쇠고리를 보니 내가 예전에 주었던 작은 장고가 매달려있는 한국기념품 열쇠고리였다. 나에게 열쇠를 건넨 막심은 큰 손가방을 들고 경쾌하게 아파트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곧장 겉옷을 입고 빵을 사러 나왔다. 아침이라 쌀쌀했다.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거리 바닥이 젖어있었다.
빵집은 아파트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빵집에 들어서자, 구수한 빵 냄새가 났다.
이 빵집은 마을 식당에 빵을 납품하는 작은 빵 공장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끼르삐치’ 하나를 샀다.
방금 구워 말랑말랑했다. 이 빵 이름의 유래를 들은 적이 있다. 러시아어로 벽돌을 ‘끼르삐치’라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벽돌처럼 아주 딱딱해지고 모양도 벽돌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2차 대전 때 군인들이 이 빵을 베고 잠을 자고, 행군할 때는 양식이 되어준 효자 빵이었다.
잔돈을 받아 돌아서는데 살인 장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갓 구운 끼르삐치의 온기가 내 손 가득 전해지는데도 등골이 싸늘해졌다. “제기랄!”
빵집 아들 안드레이는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작은 마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사건이라며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빵을 상자에 담으며 말했다. 경찰이 자기에게도 질문을 많이 하고 갔다고 했다.
죽은 나타샤가 가끔 자신의 빵집에서 빵을 사 갔고, 항상 피곤해 보였으며 아이들을 위해 비싼 파이도 사 갔다고 했다.
‘여자가 이 빵집을 들렀다는 것은 근처에 직장이 있거나 사는 집이 있다는 것인데.’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말에 짜증과 함께 경찰이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흉기는 없고 지문도 없고 칼에 잔인하게 찔린 시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드레이는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인사건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제야 사건에 관해 묻는 나를 의아해했다.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빵을 샀는데도 가게를 떠나지 않는 나에게 빠른 답변으로‘이제는 나가 주세요!’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이고 있던 빵 상자로 입구에 있던 나를 살짝 밀고는 나가 버렸다. 좀 미안했는지 가게 안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턱으로 가리키고는 배달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탁자에 놓인 신문은 어제 날짜였다. 집주인이 오기 전, 아침밥을 먹고 청소까지 하려면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있는 안드레이의 아버지에게 묻지도 않고 신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돌아온 아파트는 추웠다. 따뜻한 차가 생각났다. 나는 차 마실 물을 가스 불에 올리고, 막심이 주고 간 사과를 잘랐다. 그리고 방금 사 온 빵 위에 버터를 발라 준비해 두고,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 단서 없는 살인사건
나타샤 주변인과 시체 발견 지역 주민을 조사 중이나 단서를 찾지 못함.
나타샤는 루스끌로바 거리에서 4 정거장 떨어진 옷 수선집에서 일했음.
그녀의 집 주소는 루스끌로바 130번지.
강도 사건으로 보기에는 분실 물건이 없고 살인 수법도 잔인함.
경찰은 마약, 알코올 중독자의 충동적인 살인도 배제하지 않고 있음.
이번에는 기사 아래에 나타샤의 사진도 실려 있었다. 제보를 기다린다고 했다. 비닐로 덮여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정면 얼굴 사진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근처에 살았으니 우연히라도 스쳤을 텐데. 눈이 크고 머리카락이 풍성한 여인이었다.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년인 그녀는 예뻤다.
젊었을 때 꽤 인기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젊었을 때의 미모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윽한 그녀의 눈빛이 흑백사진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제정신일 리 없는 마약, 알코올 중독자들이 한 짓으로 보기에는 너무 깔끔한 마무리다.’
범행수법으로 보아, 원한이라더니 아직도 단서 하나 찾지 못하고 수사의 방향조차 잡지 못한 경찰이 한심해 보였다.
‘누가, 왜 이 여인을 죽였을까?’
복도에 있는 쓰레기를 발로 툭툭 밀어 1층으로 쓸어내리며 집주인은 소란스럽게 계단을 올라왔다. 큰소리로 욕을 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는 더러운 것들, 짐승 같은 이런 것들, 목을 베 죽여 버려야 해!”
말만 들으면 집주인이 바로 나타샤를 죽인 살인자 같았다.
나는 그녀가 내 아파트 문을 노크하기 전에 미리 문을 열어두었다. 방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녀의 몸 짐이 이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식탁 의자에 앉는 그녀는 연신 중얼거렸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그녀는 나에게 별일이 없는지 물었다. 탁자에 펼쳐놓은 신문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 얼굴에 땀을 흘리며 거칠게 씩씩거렸다. 나는 일부러 뜨거운 차를 건넸다. 컵에 있는 손가락 구멍에 그녀의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 구멍 따위가 대수겠냐는 듯 덥석! 뜨거운 컵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물었다.
“최근에 옆집에 사는 막심을 봤어?”
오늘 아침에도 만났고, 그의 고양이도 맡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 있었던 살인사건의 범인을 아직 못 잡았어! 내 생각은 막심이 범인 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순진해 보이지만 가면을 쓰고 있는 살인자야.”
거의 확신에 가깝게 말했다. 순식간에 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내내 입에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죽은 여자를 좋아했었는데 여자가 계속 거절하니까, 아마 죽였을 거야! 우즈베키스탄사람들이 러시아 여자를 좋아하잖아.” 신문을 한번 곁눈질했다.
“못 사는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면 안 되는 건데. 머리카락이 까만 인간들은 짐승 같은 면이 있어. 충동적인 동물이야!” 듣고 있기 거북했다.
한두 번 당한 인종차별도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직 증거는 없지만, 곧 증거를 찾을 것이고, 범인은 막심이라고 말했다. 빨라지는 주인 여자의 말에 짜증이 났다. 그녀는 차와 함께 내놓은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막심을 잘 지켜봐야 해!”라는 말을 하면서 나를 보는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번쩍였다.
그녀의 말은 마치, 막심을 조심하라는 말이 아닌,
‘너는 막심과 뭐가 다른데?’라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집주인의 눈에는 막심과 내가 다르지 않았으니까! 집주인에게 우리는 그냥 같은 이방인일 뿐이니까.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어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그녀는 어김없이 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내가 재빨리 준비해 둔 월세를 내밀자, 거대한 손으로 봉투를 거머쥐며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자기는 돈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거대한 몸을 이끌고 사라졌다.
집주인은 떠났지만, 그녀가 던진 수많은 말들이 막심을 범인으로 만들어 놓고 갔다.
‘그가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나에게도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가 범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외투에 넣어 두었던 막심의 아파트 열쇠를 찾았다. 고양이를 살피기 위해 간다는 핑계로 나는 그의 아파트를 보기로 했다.
열쇠를 막심의 아파트 열쇠 구멍에 넣었다. 열쇠가 잘 돌아가지 않아 몸으로 문을 밀어 열쇠를 돌려보았다. 그제야 돌아가는 열쇠. 처음으로 그의 아파트 안까지 들어가 보는 거였다. 우리의 만남은 늘 서로의 문 앞까지였다. 마치 우리의 관계같이 말이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고양이 오줌 냄새에 숨을 쉴 수 없었다. 흔히 고양이를 키우는 러시아 집에서 나는 냄새였다.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놀랐다.
창문 너머 펼쳐진 풍경은 내 아파트에서는 상상조차 없는 풍경이었다.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들도 보였다. 마을 중앙에 있는 중앙공원도 보였고 마을 끝에 있는 루스끌로바 130번지 아파트 건물까지도 보였다. 살해당한 나타샤가 살던 아파트. 파란색 페인트로 선명히 쓰여 있는 주소 130번지.
불어오는 바람이 참 시원하고 좋았다. 한참을 창문 너머 풍경을 보고 있는데 품종을 알 수 없는 까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태어난 지 3개월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고양이였다. 작은 울음소리가 귀여웠다. 급하게 들어오는 바람에 미처 닿지 못한 아파트 문이 삐걱대며 소리를 냈다. 문을 닫고 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 꽂혀 있는 가족사진. 디반(침대 겸 소파) 위에 깔끔히 정리된 이불. 내 냉장고보다 작지만, 최신 모델의 냉장고도 보였다.
식탁 위에는 내가 찾기 쉽게 고양이에게 줄 통조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막심의 깔끔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살인 용의자의 집에 증거를 찾으러 온 경찰처럼. 쿵! 하고 열어두었던 창문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행동이 마치 집주인이 오늘 내 아파트에서 한 행동과 닮아 있었다.
다시 내 아파트로 돌아왔다. 내 방은 더러웠다. 방은 꼭 살인자의 방 같았다. 방 상태로 살인자를 검거한다면 바로 내가 살인자였다.
만약, 2주 후에도 막심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단지 이방인이란 이유로 막심을 의심하고 있는 집주인보다 나는 더 확실하고 타당한 이유로 그를 신고할 수 있었다.
‘고향 집으로 도망친 살인자. 막심!’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