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들고 있던 술병이 내 허벅지를 ……
가을로 접어들면서 해가 빨리 지기 시작했다. 내일 한국 사업가 한 사람이 이 지역을 살펴보러 오기로 했다.
나는 통역과 길 안내를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일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버스터미널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미리 목욕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추웠다.
겨울 잠바를 입고 일찍 침대에 누웠다. 늘 그렇듯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집주인에게 그때 그러니까 막심을 범인이라고 말할 때, 나의 알리바이를 말하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물론 그녀는 내가 변명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다음 날 새벽, 일어나자마자 막심의 아파트로 갔다. 오늘은 온종일 밖에서 일하고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새끼 고양이가 종일 아무것도 못 먹게 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복도에 전등이 없으니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열쇠를 아파트 문 열쇠 구멍에 넣고 어제처럼 몸으로 문을 밀어 열쇠를 돌렸다.
고요한 새벽이라 부딪치는 열쇠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 순간 여자의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났다. 내가 서 있는 2층 쪽으로 내려오는 소리였다.
‘똑딱똑딱!’
여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문을 재빨리 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복도에 남게 됐다. 여자는 빠르게 나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여자가 지나가며 남긴 진한 향수 냄새가 머리를 띵! 하게 했다.
‘엊그제 새벽에 복도를 지나간 여자인가? 여자가 막심의 아파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나?’ 괜스레 막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온기가 없는 막심의 아파트!
고양이는 자고 있는지 인기척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양이 앞에 물과 생선 통조림을 놓고 조용히 나오려는데 열린 창문이 보였다. 어제 깜박 잊고 창문을 닫지 않은 것이다. 집안에 차가운 공기는 이것 때문이었다. 창문을 닫으려는데 가로등 사이로 한 여자가 똑딱! 똑딱! 소리를 내며 루스끌로바 130번지 건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고요한 새벽 거리에 여자의 구두 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나와 스쳤던 여자가 분명했다.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파트 복도를 지날 때 내 허벅지를 툭! 쳤던 술병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어두운 빛도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가리지 못했다.
‘한 아파트에 저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나는 왜 몰랐을까?’
새벽바람은 찼다. 옷깃을 세우고 목도리로 목을 감쌌다.
사업을 하고 싶어 탐색 왔다는 한국인 사업가는 아주 유쾌했고, 새로운 사업에 대해 쉴 새 없이 나에게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이미 운영하는 한국가게를 이곳에도 확장하고 싶다고 했다. 한류 때문에 덕을 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이 상당히 흥미롭고 신비롭다는 말을 남기고 저녁 늦게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공항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밤 11시쯤이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웅크리고 다닌 것이 나를 더 피곤하게 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이미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불을 덮은 채 이리저리 뒤척이다 고양이가 생각나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막심의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벌써 정이 들었는지 고양이는 나를 보고 반갑다는 듯이 울기 시작했다. 고양이에게 통조림을 까 준 후 창가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역시 내 아파트보다 경치가 좋았다.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왔다.
빵을 나르는 안드레이도 잘 보였다. 책방주인은 한가롭게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보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큰길에 있는 루스끌로바 공원 안에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뚱뚱한 비둘기들은 사람들이 던져놓은 음식들을 열심히 쪼아 먹고 있었다. 이 평화롭고 한가로운 풍경을 보면서 나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싱싱하기 시작했다.
‘막심은 이 창문을 통해 나타샤를 보고 호감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늦게 퇴근하는 그녀를 보게 된다. 혹시 모르니 칼도 준비한다. 말이나 한번 걸어 보려 했다. 그런데 그냥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을 뿐인데 나타샤는 막심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놀란 막심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다. 계속 발버둥 치는 그녀를 향해 칼을 꼽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살인 장소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자기의 아파트를 정리하듯이. 살인에 사용된 칼은 자신만 아는 장소에 숨긴다. 좁혀오는 수사망에 불안해진 막심은 고향 집으로 돌아가 숨기로 한다.’
가을! 화장한 어느 오후! 나는 살인자의 아파트 창가에 앉아 살인사건 시나리오를 마쳤다. 의자에서 일어나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질 것도 없는 단출한 살림살이였다. 쌓여있는 이불 사이에 손도 넣어보고 두들겨 보기도 한다. 냉장고도 열어 보고 신발장과 작은 서랍장도 꼼꼼히 살펴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방으로 들어가 칼이 있는지 확인했다.
‘막심이 이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이었나?’ 싱크대 서랍을 열자, ‘뭐지?’ 칼은 얌전히 서랍 안에 들어있었다. 약간 실망한 나는 살인할 때 입었을 옷을 찾기 시작했다.
막심이 금니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갑자기 생각나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분쯤 집을 뒤졌을까? 물론 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오늘도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는 경찰들은 계속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인인 나를 의심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외국인은 잘 오지 않는 오래되고 가난한 동네에 혼자 사는 남자니 말이다.
살인자가 누구든 지금 나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누구든 빨리 잡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설상 막심이 범인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고양이를 데리고 내 아파트로 돌아와 버렸다. 혼자 고양이를 그 집에 두기가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