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과 비행, 떠나는 기분

곤두선 몸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로워!

by 반하의 수필


한낮의 인천 공항, 높은 천장과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 광활하고 모든 것에 흰 조명이 비친다.

여름 샌들과 겨울 부츠들이 제각기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부치는 짐으로 보낸 후 기내용 캐리어와 배낭, 보조가방을 짊어지고 게이트로 향한다.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한국에 일 년 뒤에나 돌아오리라는 사실이 왠지 엄청난 감정을 느껴야 할 것만 같다. 일 년이 얼마나 긴 것인지 혹은 짧은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게이트 앞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 배웅해 주는 친구에게 이런 말들을 내뱉는다.


“우리는 현재에 살 뿐이고 미래의 감정을 끌어올 수는 없는 거야. 지금 흐르는 건 일시적이고 필연적인 눈물일 뿐이야. 나는 감성에 빠지고 싶지 않아. 지금 우리의 인사는 내일 만나는 상황의 인사랑 사실 똑같은 거 아닐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양 친구는 아쉽고도 밝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의 영상 속에서 나는 나는 촉촉하고도 부은 눈으로 손을 흔들고, 방방 뛰며 승강장으로 달려간다.


짐검사와 여권 검사를 마치자 깨끗하고 화려한 공항의 면세점들이 나타난다.

목베개를 목에 걸거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사람들, 반바지를 입거나 겨울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지난다.

환한 햇빛이 들어오는 크고 깨끗한 벽면의 창 밖으로 맑고 푸른 하늘과 승객을 기다리는 여러 대의 비행기가 보인다.


지금껏 여러 작별인사를 하며 눈물을 멈춰세우기를 반복했지만,

정말 혼자가 되자 걱정이나 슬픔은 흔적도 없이 휘발된다.

그 자리에는 참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두근거림과 신남이 솔솔 올라오더니 빠른 속도로 폭발한다.

왁! 이게 얼마나 행운이고 축복이며 모두가 바라고 무엇보다 내가 많이 바라고 모두가 응원해줬고 결국 성취한 꿈의 날이냐!


상기된 기분으로 걷는 반딱반딱 빛나는 공항의 바닥은 마치 레드카펫 위를 걷는 기분이다.

관중은 과거의 나다.

독일 작가 헤세의 책에 빠져 전집을 읽어가던 열일곱의 나,

수능을 마치자마자 독일어 공부를 시작하던 열아홉 끝자락의 나,

교환학생을 위해 성적을 관리하던 대학생 나,

시험기간에도 방학에도 독일어 학원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던 나,

처음 영어 면접을 보고 면접 자리에서 독일어 상황극을 하던 나.

독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꾸던 모든 순간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모든 순간이 이 자리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


그렇지만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나는 꽤 많은 기내용 짐을 챙겨야 한다. 덜렁거리다 휴대폰이나 여권같이 중요한 것을 잃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기에 신경이 곤두선다. 푸릇푸릇하고 명료한 긴장감에 세상이 한층 더 또렷해진다. 내 짐들과 내 몸을 보이지 않은 끈으로 엮어 그것들까지 내 몸으로 인식해야지. 정신을 바짝 차리려 안경을 꺼내 쓰고 눈을 크게 뜬다. 아직은 한국땅, 익숙한 공항이지만 내 집, 내 방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곤두선 몸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와 헤어지는 건 다시 만날 기쁨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슬퍼도 괜찮다. 그런데 떠나는 건, 특히 이렇게 말랑말랑한 젊은 날, 내가 너무 완성되지 않았을 때 떠나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며칠 전 캘린더에서 나의 출국일인 3월 20일이 국제 행복의 날이라는 걸 발견했다. 비록 제일 싸다는 이유로 부치는 짐이 하나 밖에 안 되고 한 밤중의 베이징 공항에서 여덟 시간이나 견뎌야 하는 에어차이나를 끊어버린 걸 후회했었지만, 그 항공권의 날짜가 유엔에서 정한 국제 행복의 날이라니, 이 우연은 찬성이다. 마음속으로 외친다. 나는 국제적으로 행복하고 완전 무사히 도착할거야!


비행, 진공 상태의 설렘. 이 나라에서 떠나 왔으며 저 나라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유일한 공간은 구름 위 비행기 뿐이고 이곳에서는 모두가 조그마한 자리에 앉아 자기만의 여행을 하고 있다. 서로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지 못한 채 비행이 끝나면 모두가 구름처럼 흩어질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도, 전화를 하거나 뛰어올 사람도 없는 하늘 위의 부재중 상태.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챙겨온 색연필, 펜,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등을 꺼내 웅크린 몸으로 일기를 쓴다. 이곳은 단연코 일기 쓰기 가장 좋은 곳이다. 해야할 일 없이 느리게 지나는 시간을 버티기만 하면 되는 일, 그 속에서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 종이와 알록달록한 색연필, 잘 써지는 깔끔한 펜만 있다면 흐르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이 비행의 작은 방은 곧 독일의 작은 방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비행기의 흰 조명 대신 노란 조명을 켜두고 같은 일기장을 펼칠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예쁜 튤립 몇 송이를 책상 위에 둘 것이다. 어떤 하루를 보내고 올 지 모르겠지만 늘 도착할 나의 방이 있다는 사실과 어떤 일들이 펼쳐질 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내 모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글로 적고, 영수증이나 티켓을 일기장에 붙이고, 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산책을 하고, 살짝 어두운 노란 조명과 나무 탁자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할 사람들의 분위기, 혼자 있을 때 내 모습. 기분 좋을 때의 감각과 쭈구리가 될 때의 모습들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나의 집은 떠나온 장소가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걸 믿으며 비행기에서도 태연한 잠에 빠진다.





IMG_2330.HEIC 지루해애 너무 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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