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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솜사탕 Mar 11. 2022

2화. 내가 뇌경색이라니

만 28세, 뇌경색 판정받았습니다.│얼렁뚱땅 써보는 투병일기

DAY 2 : 입원 둘째 날


 다음 날 새벽 5시 반, 다시 MRI를 찍는다고 해서 휠체어를 타고 옮겨졌다.(*낙상 주의 환자들은 이송 기사님이 와서 검사실까지 옮겨주신다.) 어제 10분짜리 MRI를 찍는 것도 매우 고통이었기에 왜 다시 찍는지 물어봤다. 어제 한 것은 응급 차원에서 한 간단한 검사고 오늘은 시신경까지 상세히 보는 50분짜리 검사라고 했다.

당시 사진이 있을 리가 없기에 구글에서 긁어왔다. 저렇게 머리를 고정한 채로 숨 막히는 원통 속에 들어가야 한다.


 긴 원통 속에서 마스크도 끼고, 한쪽 눈까지 가린 채로 50분간 꼼짝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나한테 폐소 공포증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좋겠는데, MRI 검사 내내 미친 듯이 시끄러운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반복된다. 귀마개를 끼워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는 것은 포기하고 이 답답함과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들려오는 소리에 맞추어 멜로디를 붙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소리가 드럼 소리라고 생각하며 내가 보컬이 되어 노래하는 상상을 했다.(그때 만든(?) 노래는 아직도 흥얼거린다. 90년대 니켈로디언 채널에서나 나올 법한 ‘She’s gonna be a superstar’라는 락 음악이다.) 그러다가도 너무 시간이 안 가서 구구단을 1단부터 9단까지, 그리고 다시 9단부터 1단까지 외기도 했다. 힘들면 누르라고 쥐어주셨던 버튼을 누르면 혹시라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할까 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성을 잃고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가까스로 검사가 끝이 났다. 다시 병실로 옮겨진 나는 더 이상 그 원통 속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에 감사해하며 쉬었다.


 왜인지 아침밥으로 저 콜레스테롤 식사가 나왔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왜 일반식 말고 처방식이 나왔지 싶었다. 입맛이 없어 밥을 먹지 않고 대신 어제 친구가 주고 간 바나나를 먹었다.


 그런데 아침 9시쯤, 한 의사가 찾아와 얘기했다. 어제 한 검사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새벽에 다시 진행한 정밀 검사에서 시신경에 뇌경색으로 보이는 뇌 병변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며 다급히 사라졌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지?’였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살았기에 나한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하고 근본적인 이유와 탓할 곳을 찾게 된다. 정신을 차린 나는 가족들과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와중에 가족들 모두 코로나로 아픈 상태라 연락도 쉽지 않았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가족 대신 같이 사는 친구(*날 병원에 데려와준 그 친구다)를 의지하게 되었다.


 비보에 정신이 없던 것도 잠시, 오전 9시부터 묘하게 눈이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기우는 증상도 사라져 이제 곧잘 걸어다녔다. 새벽 2시에 간호사가 갑자기 찾아와 자궁내막종 치료용으로 먹던 호르몬제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약 복용을 중단한 것 때문에 갑자기 호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작년 8월 자궁내막종 수술을 해서, 그 이후 재발을 막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로라엔정이라는 호르몬제를 복용 중이다.) 의사 역시 그 자궁내막종 약에 피를 끈적이게 하는 성분이 있어 의심 중이라고 했다. 약효가 24시간 지속되어 매일 아침 9시마다 먹었는데, 정확히 약을 끊은 9시부터 눈이 호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 타이밍 때문에 내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사실 그냥 탓할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 나이에 내가 뇌경색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않나. 뭔가 잘못 먹은 탓이겠지 싶었다. 의사도 아직 정확히는 모르니 검사를 더 진행해봐야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그 약 때문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눈은 서서히 잘 보이게 되었지만 복시에서 정상 시야를 왔다 갔다 했다. 온전하진 않아도 이전보다 잘 보이니 훨씬 숨통이 트였다. 이제는 제법 또렷하게 보이는 수액과 천장을 바라보며 눈이 잘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끼고 또 느꼈다.


 시력이 호전된 것을 떠나서 뇌경색이 온 것은 맞으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뇌졸중 중환자들이 모이는 뇌졸중 집중치료실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병상에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아 짐을 다 싸고도 한참을 기다렸다. 이 와중에 오늘이 청년희망적금 신청일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수많은 대기를 기다려가며 가입했다.(눈이 보이든가 말든가 이자율 높은 청년 적금은 놓칠 수 없지랄까.)


 집중치료실로 옮기기 전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내 뇌 MRI를 보여주며 뇌경색이 있는 곳을 알려주셨다. 화면에 보이는 정말 작디작은 흰색 먼지 같은 게 날 이렇게 아프게 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작은데도 눈이 안 보이기도 하나요?” 하고 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당연하다며, 위치가 시신경이라 그나마 복시 정도의 증상이 나타난 거지, 아마 같은 사이즈로 다른 위치였다면 어디 하나 마비되어 실려왔을 거라고 하셨다. 다행이라고 하는데… 정말 다행이었다면 여기 오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삐딱한 마음만 들었다.


 얼마나 병원에 있어야 하냐고 물어보니 보통 집중치료실에 들어가면 5일 정도 치료하고, 그 이후로 일반 병실에서도 며칠을 보낸다고 했다. 거의 일주일은 입원해 있어야 할 거라는 말에 나는 완전히 낙담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회사 차장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걱정 말고 치료에 전념하라는 말씀에 안심과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집중치료실로 옮겨지기 전까지도 휠체어를 타고 수많은 검사실을 다녔다. 뇌혈류 검사 동안에는 머리에 씌우는 기기를 어찌나 꽉 조이던지, 검사하는 선생님이 삼장법사고 내가 손오공이 된 기분이었다. 관자놀이가 너무 아파서 기기를 벗어던져버리고 싶었다. 그저 빨리 검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야속한 의사 선생님은 아프다는 말에도 금방 끝난다는 말만 반복했다. (물론 절대 금방 끝나지 않았다.) 심장 초음파 검사도 했는데, 무슨 기계를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더니 젤을 잔뜩 바르고는 기기로 힘줘서 누르기 시작했다. 티비에서 임신부의 초음파 검사를 봤을 때는 그냥 배를 부드럽게 문질문질 하고,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는... 그런 훈훈한 장면이었는데... 내 가슴팍은 왜 이리 세게 누르시는 걸까, 갈비뼈가 다 눌리는 듯했다. 초음파 담당 선생님들은 아마 팔 힘이 굉장히 좋아야 할 것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대기하다 오후 늦게 자리가 나 집중치료실로 이동했다. 그때쯤 나는 이미 눈이 80% 정도 회복되어 카톡도 하고 태블릿으로 영화도 볼 수 있었다.(물론 흐릿하고 두 개로 보였지만) 그런 와중에 보호자도 올 수 없고 커튼도 없어 프라이버시라고는 없는 집중치료실에 들어가는 건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많이 회복된 것 같은데 왜! 왜 중환자실에 가야 하는가! 원래대로라면 같이 사는 친구가 PCR을 마치고 보호자로 와주기로 했는데, 집중치료실은 보호자 출입금지인 곳이라 아예 올 수조차 없게 되었다.


 끝없는 검사도 힘들지만, 제일 힘든 건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늘 아플 때마다 감사하게도 가족이나 친구가 옆에 있어주었던 나는,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홀로 입원하게 된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뇌졸중 환자만 모여있는 8층은 대부분 나이대가 높은 환자들만 가득한데다가, 집중치료실은 정말 중환자만 들어오는 곳이라 거동도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속에서 5일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이 나이에 중환자가 된 것 같아 너무 절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커튼을 칠 수 없어 사방이 뚫려있는 집중치료실에서의 첫 식사


 제일 외로웠던 건 식사 시간이었다. 가뜩이나 맛없는 병원 밥을 혼자 먹을 때마다 이 상황이 가장 실감이 나 자꾸 눈물만 났다. 이상하게 검사나 치료 시간보다 식사 시간에 가장 내가 처한 상황이 피부로 와닿았다. 동생과 엄마가 있는 카톡방에 눈물만 난다는 톡을 보내고 혼자 울고 있는데, 남동생이 보낸 위로의 톡이 왔다. 자기가 군대를 갔을 시절의 이야기였다. 가족과 헤어져 훈련소에 들어간 첫날 근무를 서던 이야기, 몸이 아파 군 병원에 혼자 입원했을 때의 이야기 등등 묘하게도 그 군대 얘기가 병원에 머물며 들은 위로 중 가장 위로가 됐다. 나는 군대처럼 2년을 여기 있을 것도 아니고, 고작 일주일 정도 있는 건데 뭐가 그렇게 힘이 드나 싶은 생각에 왠지 힘이 났다. 물론 쿨타임이 짧아 다시 눈물로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말이다.


 집중치료실에서는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 늘 손가락과 가슴에 심전도계(…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같은 기계를 달고 있어야 했다. 이 병동의 8명 모두가 이걸 달고 있으며 가끔 연결이 끊어지면 삐삐 소리도 나서 굉장히 거슬렸다. 자꾸 욕을 내뱉는 옆자리 할아버지는 지인들에게 전화가 올때마다 내 이야기를 꺼냈다. 중환자실에 젊은 사람도 온다면서 말이다. 이렇게 젊은이가 들어오는 걸 보니 내가 술 많이 마시고 막 살아서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요즘 다들 많이 걸리는 병인가보다고 큰소리로 얘기하셨다.(아닐걸요...?)


 맞은편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오늘은 날씨가 맑습니다.’와 같은 문장 말하기 연습을 반복했다. 간호사가 매일 시키는 뇌졸중 검사를 연습하는 듯했다. 물론 나도 그 검사를 해야 했다. 누워서 두 팔 위로 5초간 들기, 양다리 위로 5초간 들기, 내 코를 찍었다가 간호사의 손가락 찍기, 양 뺨과 팔다리에 감각이 있는지 체크하기, ‘똑딱똑딱’ 같은 문장을 따라 큰소리로 발음해보기 등이었다. 나는 많이 호전되어 검사를 무리 없이 해냈다. 그런데 무리 없이 해낼수록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 주체를 알 수 없는 원망감이 날 괴롭혔다. 그렇게 절망감 속에서 집중치료실에서의 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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