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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경 Oct 26. 2022

당신의 선택은

캐디와 사람

새벽 3시 50분. 알람 없이 눈이 뜨였다.

또 기계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심지어 오늘은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눈을 뜨고 말았다.

눈을 뜨고 0.3초 동안은 오늘이 출근을 하는 날인지 아닌지 가늠하느라 신경세포들이 스파크를 일으켰는지 놀라기까지 했다.

이내 쉬는 날인지를 알고는 마음을 놓는다.

박차려던 이불을 슬며시 끌어당긴다.

옆에 쉴 새 없는 코골이 남편에게도 이불을 덮어주는 선정(?)을 베푸는 여유로운 새벽이다.

다시 눈을 붙이려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출근해야 하는 날은 잘도 눈이 감기더니만, 정작 자도 되는 날은 설렘에 눈이 쉬이 떠진다.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몸만 침대에 누워있고 이미 정신은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기야 이 시간은 운전을 하며 근길 위에 있을 테니... 내 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나 보다.

자고 있는 남편 때문에 TV를 켤 수도, 불을 켤 수도 없어 휴대폰과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라디오를 듣는다.

KBS 클래식 FM 라디오 방송이 내가 즐겨 듣는 채널이다.


나이가 들면서 취향도 변한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핑크나 파스텔톤의  색깔을 좋아했던 것이 다홍 , 파랑, 녹색 계열의 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영원히 바다만을 좋아하고 나이가 들면 바닷가 마을에 집을 구해 살고 싶다는 소망을 꿈꿨었는데 지금은 초록에 지쳐 잠들고 싶은 산으로 가서 살고 싶다.

라면보다는 알리오 올레가 좋고, 옷도 달라붙는 것보다는 람결을 감싸 안을 품이 있는 것이 좋다.

이 변화는 생물적 나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된 데에는 취향의 달라짐보다는 신체기관의 퇴화에 기인한다.

청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증상으로 이명이 시작되었다.

그 이명을 중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활 속 BGM(배경음악)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 클래식을 가까이하게 된 이유였다.

굳이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는 의견은 아니었으나,  매일 사람을 대해야 하는 직업 때문인지 가끔은 사람의 소리가 신경 자극제로 느껴져 선율 위주의 음악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클래식에 스며들었다.

클래식 라디오 방송은 몇 분을 제외하고는 KBS의 전문 아나운서가 진행을 한다.

그들의 인지도와 상관없이 나이도 좀 있고  입사년차도 제법 되는 아나운서들이 맡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차분하고 매끄럽다.

가끔 문자나 엽서로 보낸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해준다.

그들의 사연엔 모든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마치 사연에 대한 댓글처럼 그들의 추임새가 더해진다.

사연에 대한 그들의 소해를 듣다 보면, 사람살이에 대한 그들의 경험과 생각이 배어 나온다.

작가가 미리 써준 원고일 수도, 아니면 진행자 자신의 즉흥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적절한 언어와 속도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사려 깊음에 비록 휘발성이 강한 게 말이라지만  두고두고 간직하게 되는 것도 말이 아닌가 싶다.


장 보러 가는 길 차 안, 남편이  라디오 주파수를 돌린다.

늘 클래식 FM에 맞춰 있던 걸,  바꾸는 것이다. 나는 못마땅했으나 승강이하기 싫어 말리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통통 튀는 진행자들의 말과 위트는 신선했다.

내가 다른 세계에 머무르다 타임슬립 한 것처럼 색다른 느낌, 푸릇한 에너지가 기운끌어올렸다.

같은 KBS 방송이지만 결이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을 들으며 , 문득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어느 진행자의 방식이 마음에 드는지를...



우리 회사는 캐디 등급제를 실시하지 않는다.

그 말인 즉, 타 골프장은 시행하는 곳도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캐디 등급제라 함은 일관된 캐디피 정책이 아니라 캐디의 일에 대한 숙련도에 따라 캐디피를 차등 적용한다는 것이다.

등급제라고 하니 일단 거부감이 먼저 드는 건 내가 등급의 분류 대상자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골퍼들의 시각으로 보면 마땅히 있어야 할 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문제를 논쟁의 대상으로 끌어올릴 생각은 없다.


내가 입사할 당시, 골프장에는 이상한 관행이 있었다.

경력 캐디 채용을 기피한다는 것이다.

아예 골프에 '골'자도 모르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처음부터 교육을 시키는 시스템이었다.

어쩌면 그건 명목상의 이유고 실질적 이유는 <어리고 예쁜 사람>을 채용하려는 거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만큼 교육기간도 길어지고 관리도 쉽지 않을 텐데 굳이 골프장마다 그런 형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때문에 경력자들이 타회사로 이직을 하는 것이 쉽지 않자, 경력사항을 숨기고 입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골라내는 우리 회사 교육팀장님의 노하우가 있었다.

코스 실전교육 시에 배토(뜯어진 잔디 자리에 모래를 덮어 주는 것)를 시켜 보는 것이다.

캐디들은 매일 라운드 근무가 끝나면 정해진 홀로 나가 배토작업을 한다.

일종의 홀 청소와 더불어 잔디 보수관리의 작업인 셈이다.

따로 작업을 하는 코스관리과 직원들이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그 광활한 대지를 몇 명이 소화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캐디들이 함께 동원되는 것이다. 모래주머니에 모래를  가득 담고 해당 홀로 이동하여 걸으면서 뜯겨 나간 잔디를 다시 주워와 붙이기도 하고, 모래로 구멍을 메꾸기도 한다. 이때 모래 삽으로 모래를 떠서 손목 스냅을 이용하면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정확하게 위에서 아래로 모래를 던져 그 자리를 메꿀 수 있다. 단순작업이지만 익숙해지려면 어느 정도 시간과 반복 작업이 필요하다. 경력 캐디들은 수없이 이런 작업을 해 왔을 테니 그 동작을 일부러 어설프게 하기도 어렵다.

그 점에 착안한 경력 캐디 감별법... 용인할 수 없으나 그 시절은 그랬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참 궁금했다.

일의 효율성을 따진다면 경력사원들을 뽑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을 ,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경력사원들을 배제시키려 했던 건, 타성에 젖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심을 잃고 편한 쪽으로만 행동하려 하여  업무에서 좋지 않은 결과와 영향을 미칠 거라고  미리 낙인찍는 것이다.

글쎄 사람이라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조금이라도 긴장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게을러지고 편해지려는 게 인간이니까.

하지만, 애초에 기회마저 주지 않는 건, 부당한 거 아닌가!

그 당시의 캐디 문화도 책임이 가볍지는 않다.

우리의 수치이지만 소수의 무책임한 행동들이 선한 다수들을 함께 끌어내려 추락된 우리의 명예는 다시 그 날갯짓을 하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당한 관행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매의 눈'의 별명으로 불리던 캐디 감별사 교육팀장님이었다.

별명답게 나에게도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멀리 서라도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면 마주치기 싫어 얼른 다른 길로 돌아서 가곤 했다.


매달 1회 필수근무자만 제외하고 전 캐디가 모여 전체 미팅 겸 교육을 받는다.

회사 중역들로부터 회사 상황에 대해 듣기도 하고 교육팀님으로부터 보수교육차원의 마인드 교육을 받는다.

그날도 갑작스레 캐디 전체 교육이 있다며 소집을 알렸다.

 피교육자인 우리 입장에선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다. 그런데, 긴급 소집이라니...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하다는 불안은 깜짝 뉴스로 마무리되었다.

갑자기 교육팀장님이 퇴사를 한다는 것과 그에 대한 마지막 인사를 위한 자리였던 것이다.

나로서는 이젠 그녀를 피해 도망 다닐 이유가 없으니 속이 후련할 텐데 그날의 일기는 다르게 적고 있었다.

시원함보다 섭섭한 마음으로 기울어 있었다. 세상에 쉬운 이별은 없는 법이니...

그녀는 '잘 있으라'는 당부 대신 '다시 보자'라는 해후를 기약했다.

소설의 복선과도 같았던 그녀의 인사는 곧 현실이 되었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그녀를 보냈고 겨울을 시작하며 그녀를 다시 났다.

그녀는 신설 골프장으로 옮긴 상태였고, 그 회사 구경을 시켜준다며 나랑 친한 언니들과 함께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단순 초청이 목적이 아니었다. 캐디 포섭 작전을 펼는 중이었다. 그 대상으로 낙점되어 뜻하지 않던 전개가 이루어졌다.

"매의 눈"의 그녀는 캐디 교육만이 아닌 골프장의 꽃, 핵심부서인 경기팀의 팀장으로 새로운 인력들을 발탁하여 그녀만의 새로운 구상의 경기팀을 만들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관행을 깬 이번엔 신입이 아닌 경력 캐디로만 구성한 경기팀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례가 없는 것, 처음으로 길을 내는 자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기대... 지금도 기억한다.

체력단련 차 달린 아침 훈련 때, 오름  정상에서 일출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던 그녀의 뒷모습.

한껏 오므린 작은 양 어깨에는 간절함이 가득 얹혀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이 마치 그녀 앞을 밝히는 촛불 같았다.

 강하고 날카롭게만 보았던, 그래서 나를 도망치게 만들었던 그녀의 가장 약하고 여린 모습은 내가 진정으로 그녀에게 마음을 보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의 교육법은 우리를 '초기화'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백지상태로 돌아가 나태한 나의 출현을 막아내는 것, 교육내용의 대부분이 서비스 마인드 교육과 코스 실전 교육이었다.

캐디업무스킬보다는 정신교육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골퍼들도 이미 몸에 굳어진 잘못된 스윙을 교정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말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효과가 좋다고 한다.

우리 역시 몸에 배어버린 나쁜 습성을 걷어내는 것, 쉽지 않았다.

손짓, 몸짓, 말투, 서비스화법, 얼굴 표정, 목소리의 톤, 심지어 화장법까지 전 인원이 마치 한 사람인 듯 일사불란하게 매무새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교육은 반복에 반복 그리고 테스트... 힘들어 중간에 퇴사를 한 이들도 몇 있었다.

마침내 그랜드 오픈전 시범라운딩... 우선 VIP회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실제 라운딩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피드백의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캐디들의 업무능력은 코스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회원권 분양으로 이어져 초 대박이 난 것이다.

회사 정보와 상황을 모두 공유하고 숙지하면서 적절하게 홍보하다 보니 사명감이 남달라 보였나 보다.

그곳의 직원들을 보면 그 회사를 안다고 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삽시간에 번졌다.

힘든 만큼 보람도 있고 , 정말 사명감과 자부심이 무엇인 지 십분 알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전설은 시작되었고 지금은 오래된 이야기로 남았다. 선구자와도 같았던 그녀도 떠났다.

그때를 그리워하는 몇 명만이 남아 각자의 기억의 무늬를 맞추어 볼 뿐...


한동안 회사에서 지정 캐디제를 운영한 적이 있다.

라운딩을 하고 나서 그 캐디가 마음에 들면, 다음 방문 시 계속 그 팀에 배정이 되어 근무를 하는 방식이다.

 그중에 신입캐디만을 지정하는 회원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서브 스킬면에서 다소 서툰 부분이 있을 텐데도 그들을 선택하는 회원들을 보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나라면 노련하고 매끄러운 경기를 할 수 있는 경력 캐디를 원할 것인가, 아니면 스킬은 좀 떨어져도 풋풋하고 생동감 넘치는 신입캐디를 택할 것인가?

분명 저마다의 선택일 것이다.

노련함만이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서툴고 어리숙한 것이 꼭 약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나에겐 위기일까? 위로일까?



아침 TV 뉴스 생방송에 기상캐스터가 바뀌었다.

얼굴도 생소하고, 긴장한 탓인지 연신 실수를 한다.

나는 채널을 돌려 버렸다.

그리곤 나도 참 매정하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응원해 줄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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