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레테가 던져주는 심리적 변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안 괜찮은 기분

by 대치동 비둘기

대치동 학원가는 1월을 기준으로 새학년도를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미 레테를 마치고 반편성이 끝난 상태이다. 물론, 3월에 다시 시작하는 반도 있긴 하지만 방학특강 또는 방학 시간표를 기점으로 새로운 학년을 붙인다.



학원비 내면 들어가는거 아니야?



과거 학원이라 하면, 내가 듣고 싶을 때 아니면 엄마가 보내고 싶을 때 언제든 들어가는 곳이었지만 요즘은 전혀 상황이 달라졌다. 분명 출산율은 낮아지고 아이들은 없다지만, 모두가 '보내고 싶어하는 학원'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고 '자격'이 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그 '자격'이라 함은 표면적으로는 아이가 학원 수업을 따라올 수 있는가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학원의 입맛에 맞는 아이를 뽑는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영어학원 A는 장난꾸러기 남자 아이는 뽑지 않고, B는 에세이를 정리하듯 잘 쓰는 아이를 뽑고, C는 악세사리나 장신구를 수업 중에 하지 않을 아이를 뽑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학원에 레테를 붙고서도, 학원 규율이 마치 보딩스쿨처럼 엄격해 포기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어쨌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오후 1시나 2시면 나오는 아이의 오후 스케쥴을 채워넣기 위해 학원을 수소문하고 줄을 서게 되는데, 아이 수준에 맞고 학원이 유익한 곳을 찾는 것은 마치 천생연분의 내 짝을 찾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게다가 '거절'이라도 당한다면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되는지.



일단 1년 대기하셔야해요.



레테가 없는, 학년제 국어 학원 중 인기가 많은 곳은 이미 입학도 하기전 대기를 해두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7세 반이 있어 유치원 때 먼저 대기하다가 들어가면 연계되어 진급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만약 기회가 왔는데 다음으로 미루면 순번이 올지 안 올지는 미지수이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레벨테스트'조차 선착순으로 받는 곳이 있어 '온라인 선착순 전문 대행업체'도 있다. 그러니 똥손이거나 버벅이거나 그 시간에 입금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면 대행업체를 사용해야만 한다. 정말이지 하늘의 별따기 같은 레테 기회마저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또 박탈당하는데, 컨디션 관리와 시험 준비를 하다보면 마치 내가 아이를 오디션장에 밀어넣는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게 된다.



full_7세_고시,_누구를_위한_시험인가___추적60분_1400회_KBS_250214_방송_3-1_screenshot.png 출처 추적 60분 <7세 고시>


<7세 고시>라고 불리는 시험도 초등학교 입학 후 갈 영어학원의 '레벨테스트'이다. 특정 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지, 입학한다면 어떤 반에 배정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인 것인데, 요즘은 그런 레테를 통과하고 높은 반을 배정받는 것이 아이의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현실이다.





full_7세_고시,_누구를_위한_시험인가___추적60분_1400회_KBS_250214_방송_2-42_screenshot.png 출처 추적 60분 <7세 고시>







레테가 주는 심리적인 영향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단 레테 전과 레테 중, 레테 후로 나눠볼 수 있다. 물론 레테 전에 학령기 자녀가 없다면 경우가 좀 다를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녀가 레테를 보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이다.



<레테 전>

1. 학원을 가려하니 레테를 봐야하다니

2. 일단 신청을 해봐야지

3. 그런데 어떻게 신청하지

4. 신청 방법이 다 다르네

5. 인기 많은 곳은 선착순에 엄청 빡세네

6. 신청실패 : 아... 나는 이거부터 못하는 엄마구나.. 다음 기회는 언제야?

7. 신청성공 : 얼떨결에? 이렇게 되는거 맞나? 확인 전화해볼까?

8. 레테 보는걸 아이한테 말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9. 뭘 어떻게 보는거야?

10. @#$%$^@!? 레테가 뭐 이렇게 빡세 전문 과외가 따로 있어?

11. 일단 보자 일단 봐

12. (내심) 적당히 나오겠지, 생각보다 잘 보는거 아니야?




<레테날>

1. 일단 아프지 않고 컨디션 관리 잘했음 됐다

2. 시간 잘 맞춰가자

3. 엄마들 대단하네 다들

4. 저번에 다른 학원 레테에서 본 엄마 또 있네

5. 잘하고와! 너무 떨지말고.

6. 아는 건 쓰고 나와야할텐데

7. 여기 안 되면 어디가지?

8. 여기 되면 이거 다음엔 뭐랑 붙이지?

9. 정말 다들 대단하다 대단해

10. 애들 다 똑똑해보이네


<레테 후>

(불합격)

1. 준비 안했는데 이정도면 괜찮지

2. 아이한테는 시간이 안된다고 해야하려나

3. 못하는 거 상담해주는데 왜 내가 혼나는 기분

4. '어머님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뭐하신거냐'는 말만 좀 안했으면

5. 이렇게 학원 많은데 어딘가는 갈 수 있겠지

6. 진짜 다 안되면 어떡하지?

7. 아이가 떨어진 걸 알면 속상하려나

8. 일단 나도 좀 속상..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속상

9. 붙은 애들이랑 엄마 부러움

10. 다른데 빨리 신청해두자

(합격)

1. 정말 다행이다

2. 그럼 어느 반일까

3. 별로 많이 안 도와줬는데 정말 다행이다.

4. 턱걸이라도 붙는다면 감사할 따름

5. 즐겁게 수업다녔으면 좋겠다.

... 별 생각 없음 (까먹음 그간의 고통이나 고민 등)





우습게도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어느 곳이든 아이가 다닐 학원을 정하고 나면, 모진 고통(레테의 광탈)이나 레테의 전쟁에 대한 기억을 잊는다. 그땐 그랬지라는 추억이 될 뿐, 그 불쾌한 기분과 미묘함을 금새 잊고마는 것이다.



그런데, '레벨 테스트'를 우리나라 사람은 일단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고통을 즐긴다고나 할까. 대학 '서열', 내가 사는 지역의 '급지' 등 다양한 것에 대한 순위를 파악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즐긴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위에 있다는 안도감,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인지 <나>에 대해서도 <아이>에 대해서도 정확한 레벨을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종종 학원을 다니지 않을 계획이지만 아이가 어느정도 하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 레테를 신청하기도 한다. 엄마표로 집에서 하고 있지만 '이게 맞는 길인지', '잘하고 있는지' 제 3자의 눈을 통해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치동의 레벨테스트는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추후에 꽤나 큰 영향력을 끼친다.



'용의 꼬리'가 될 것인가, '뱀의 머리'가 될 것인가.

그 선택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인지 레테를 보고 나서도 어떤 학원의 몇 번째 반인지 때문에 더 레벨이 잘 나온 학원과 비교해 선택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어디가 더 좋은 선택인지 정답은 없다. 용의 꼬리를 마음 편히 여기는 사람이 있고, 뱀의 머리를 마음 편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 단지 아이가 어떤 성향인지는 부모가 어림짐작할 뿐이다.



때로는 뱀의 머리로 사는 것이 평안할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더 괜찮고 잘하는 누군가와 어울리기를 바라며 차라리 용의 꼬리가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어렵게 남들에게는 쉽다는 학원에 붙고 나서 얼마나 안도와 안심을 했는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엄청나게 어렵다는 세간을 떠들석하게 한 7세 고시에 당당히 입학해 '입학 가능'을 통보받았을 때의 그 만족감도,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레벨테스트. 그 단순한 시험 안에 수많은 논리가 담겨있다. 학원들의 입맛에 맞는 아이를 뽑든, 아이가 어느 정도 하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든, 엄마가 못해줘서 이 정도 레벨이라는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잘한다고 미래의 수준이 완전 보장받는 것은 아닐테니까

게다가 모든 걸 '엄마' 탓으로 돌리면 우리나라 엄마들은 너무 속상하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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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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