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스 요가(Zenith Yoga)는 하노이에서 유명하다. 특히 설립자인 ‘ Charlie 찰리’의 오전 수업은 늘 만원이다. 10분 전에 가지 않으면 자리를 잡지 못한다. 자칫 서로의 발 냄새를 확인하며 수업을 해야 한다. 대부분은 유로피안과 외국인들이다. 찰리와 대표인 마제나의 수업은 영어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두 명의 베트남 사람들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베트남, 한국인 강사도 있다. 리셉션의 직원들은 물론 강사들도 영어를 능숙하게 한다.
2019년 하반기에 하노이로 온 우리 가족은 코비드라는 넘사벽의 상대를 만났다. 거기에 하노이의 겨울 날씨도 한몫했다. 11월부터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는 하노이! 걸음걸음마다 발바닥이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습하다. 그리고 강한 미세먼지로 온 세상은 무성영화처럼 뿌옇게 보인다. 검거나 희멀겋거나 둘 중 하나다. 건물은 물론 도로도 실루엣만 겨우 알아볼 정도다. 상상 이상의 강적이었다. 강도 높은 록다운에 우울의 헬게이트까지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2020년이 왔다. 여전히 록다운이 온 오프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 멀쩡하게 레스토랑에서 웃고 떠들다가 다음 날, 하루아침에 아이들과 홈스쿨링을 한다. 주재원의 꽃인 하우스 키핑 서비스는 오간데 없고 한국보다 2배로 요리를 한다. 사람들과 오토바이로 북적이던 하노이가 24시간 만에 유령도시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계속 반복된다. 이렇게 멍하게 있다가는 다시 우울의 강을 건너게 된다. 이대로는 안된다. 우울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건 하노이에서 맞이한 첫해로 충분했다.
‘민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하루는 요가복을 입고 지나가는 블랜딘을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제니스에 요가 수업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거다! 잊고 있던 이름, 요가! 장롱 깊숙한 곳에서 숨어 지내던 요가복을 꺼냈다. 그리고 파리지엔 요가 강사인 블랜딘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주 2회의 요가를 시작했다. 두 달쯤 지났을 때, 그녀는 내게 제니스의 TTC를 권했다. 그렇게 제니스 요가의 대표 ‘Marzena 마제나’를 소개받았다.
갑분 전문가 양성 코스라니, 많이 망설여졌다. 2400 USD라는 금액도 금액이지만 타이트한 스케줄이 마음에 걸렸다. 격주로 금, 토, 일 주 3일을 요가원에서 보내야 한다. 금요일은 5시- 9시 그리고 주말은 12시-6시까지 훈련이 계속되었다. 한두 달에 끝나는 과정도 아니었다. 무려 200시간의 6개월 과정이었다. 과제는 물론 TTC 코스 이외에 10시간의 요가 수업을 추가로 더 이수해야 한다. 해부학, 철학의 필기시험은 물론 요가 시퀀스를 직접 짜서 25분의 데모 수업도 패스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 출석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결석이 3회 이상 되면 바로 아웃! 그럼 다음 해에 요가 수업을 다시 들어야 한다.
수료장을 받기까지 까다로운 과정의 연속이란 건 충분히 이해했다.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인데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게는 챙겨야 할 새끼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다. 쭌이와 쩡이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당시 남편은 살인적인 업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6시에는 절대 귀가할 수 없었다. 주말 출근도 일상다반사였다. 그렇다고 내니를 구하기에도 격주라 너무 불규칙했다. 내니들도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쉬고 싶어 한다. 혼자 끙끙대기에는 개강 날짜가 너무 임박해 있었다. 개강까지 남은 날짜 단 3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 놓치면 1년은 대기해야 한다. 블랜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본인의 둘째 아들, 미쉘을 떠올렸다. 집을 나서는 4시 30분부터 남편이 퇴근하는 9시 30분까지 미쉘에게 베이비 시팅을 맡겨 보자고 했다. 베이비 시팅으로 첫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서양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 13세가 되면 보통 시작하는데 미쉘은 당시 12살 하고 6개월이었다. 쩡이와 쭌이는 평소에도 미쉘을 잘 따르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블랜딘 또한 항상 집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했다. 언제든 바로 뛰어와줄 수 있는 어른이 같은 건물에 있으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아이들도 은근히 미쉘이 베이비 시팅을 와주길 손꼽아 기다렸다. 어쩐지, 내가 요가를 하러 나가는 금요일에는 얼굴에 화색이 돌더라니.. 역시 머리 검은 것들은 이렇게 홀랑 배신을 한다. 특히 신랑이 출근하는 주말에는 블랜딘이 아이들을 많이 봐주었다. 역시 이가 아니면 잇몸이라더니 내겐 프랑스 잇몸이 생긴 게 확실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난 TTC는 영영 꿈도 못 꿨을 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내적 갈등이 있었다. 유튜브에 요가를 검색해 본 이들은 안다. 요가라고 하면 아름다운 몸짱의 20대 강사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주저하던 내게 블랜딘은 말했다.
“Hey, Min! Listen! 우리는 그들과 경쟁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젊은 에너지가 있지만 우리는 원숙함이 있거든. 다리 찢고 물구나무서는 것만이 ‘요기 Yoggie’가 아니라고. 그건 서커스야.”
과연 그녀에게는 내겐 없는 원숙함이 있다.
"Do what you can with what you’ve got where you are. "
Howard Newton
뉴턴은 말했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애초에 요가는 경쟁, 비교라는 단어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그래,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어? 부산에서도 요가는 내가 가장 오래 해온 운동이었다. 필라테스, 수영, 줌바댄스, 플라잉 요가 그리고 서핑까지 안 해본 게 없다. 하지만 요가만큼 질리지 않고 꾸준히 한 게 있었나. 헬스장의 트레이닝을 제외하고는 요가가 유일무이하다. 이제 와서 뒤로 물러서는 건 ‘민스러움’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제니스 요가의 수장인 Marzena마제 나에게 톡을 보냈다. 2020년 TTC 과정이 시작하기 이틀 전에 등록을 했다. 남편은 흔쾌히 돈을 쏴주셨다. 남편 플렉스, 이러니 반하지 안 반하나. 남편이 제일 멋져 보이는 순간은 입금할 때다. 10년 연애와 12년 결혼생활에서 느낀 교훈이 하나 있다. 원래 남편이라 함은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가는 게 진정한 미덕이다.
그리고 2020년 9월 11일 금요일 6시, 대망의 TTC가 시작되었다.
첫 수업의 설렘을 아직도 기억한다. 딱 봐도 모두가 나와 10살 이상(20살 차이도 있었다.)은 차이가 나는 젊은 베트남 MZ 여성들이었다. 단 한 사람, 프랑스인 ‘Vivien 비비안’을 제외하고 말이다. 비비안은 8개월 뒤에 프랑스 파리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녀는 하노이에서 철도공사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4년을 일했다. 첫날부터 그녀는 가장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외국인임을 알아챘다. 그녀가 TTC를 시작한 이유는 강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난 4년간 하노이에서 열심히 살아낸 나에게 상을 주고 싶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모든 포즈를 완벽히 해내지 못할 거라고 미리 귀띔을 했다. 수줍어하는 그녀를 향해 “비비안, 너 멋지다.” 하고 진심으로 말했다. 순간 나의 생각의 폭이 너무 좁았던 게 아닐까. 모든 걸 경쟁과 비교 그리고 생산성에 결부시켜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TTC를 통해 강사가 되기도 하지만 모두가 강사를 꿈꾸는 건 아니었다. 단지 요가를 자기 삶에 더 가까이 두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트레이너나 한의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재활교육에 도움을 받고자 수강한 이들도 있었다. 나의 요가의 목적은 우울의 쓰나미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물론 강사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갖고 한 교실에 모여들었다.
비비안과 나는 서로를 의지하며 늘 옆으로 나란히 앉아 수업에 참석했다. 그리고 2회 차 수업에서 또 다른 외국인이 한 명 더 들어왔다. 20대 초반의 ‘Nastasia 나스타샤’는 주근깨가 매력적인 프랑스인이었다. 귀여운 미인의 첫 등장에 일제히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소녀의 얼굴을 한 나스타샤는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국제 학교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요가 강사가 되기보다는 요가를 더 진지하게 하고 싶어 등록했다고 했다. 이 셋이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블랜딘에 따르면 자신이 한창 TTC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베트남 사람은 소수고 유로피안 혹은 일본인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코비드로 외국인들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내가 TTC를 할 때, 베트남 사람들은 못해도 열두 명은 넘었다. 더구나 그들 중 넷인 한 해 전에 수료증을 못 받아 재수강하는 문자 그대로 재수생들이었다. 재수생들은 수업을 들락날락하며 다소 느슨한 참석률을 보였다. 하지만 하나같이 하는 말이 수료장을 따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잠시 비비안과 나스타샤로부터 받았던 안도감이 사라졌다. 한 방에 수료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나. 무모한 도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순간 쐐~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한 도전인데, 뭔가 고생을 내돈내산한 듯한 예감이 들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우리의 ‘guru 구루’ Marzena마제나와 Thuy 투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P.S. 베트남에는 요가의 역사가 한국처럼 오래되지 않았다. 젊은 세대가 요가 강사가 되기를 희망하고 인기가 많아진 것도 최근 몇 년이라고 한다. 그만큼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부족하다. 하여 오토바이를 몰고 편도 1시간, 왕복 2시간이 걸려 오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20대 초반의 숙녀들이었다. 두 세명 정도 아기 엄마도 있었지만 끽해봐야 2말 3초였다. 그들의 유연성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흡사 서커스단과도 같은 곡예를 보여주곤 했다. 나와 비비안 그리고 나스타샤는 ‘우와’하며 관객 모드가 되어 열광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포즈가 있었다. 누군가는 나의 노력을 탓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죽을힘을 다해 정말 성실하고 열심히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