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감정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로버트 플루치크 교수는 '감정의 바퀴(Wheel of Emotions)'를 만들며, 인간의 기본 감정에는 8가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분노, 공포, 슬픔, 혐오, 놀람, 기대, 신뢰, 기쁨.
8가지 감정이 섞이고 합쳐져 여러 가지 다른 감정들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감정은 우리에게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기분을 만들어낸다. 감정에 따라 아무것도 내가 해낼 수 없을 것 같다가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씩씩해야 하고, 어떠한 그늘 속에서도 이면의 빛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강원도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여의도에 직장을 구하기까지 수많은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선택의 결과는 오롯이 나의 책임이었다. 결과가 좋든 안 좋든 나는 일어서야만 했다. 어떤 선택이든 최선을 다 했고, 결과가 최고가 될 때까지 애를 쓰며 버텼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은 나를 방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난 괜찮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인 태도로 애쓰면 '나도 건강하게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내 부정적인 감정들은 무시했다.
'누구든 다 힘든 법이잖아. 이까짓 일로 쉴 수는 없어.'
어떤 때는 나를 일부러 가혹한 생각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답이 생각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이 뛰고 손발에서 땀이 났다. '이런 걸로 힘들어하면 안 돼.' 움츠러든 내 안의 자아에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질렀다.
공황장애를 겪고 나서 나는 많이 달라졌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쉬어야겠다고 생각이 들 땐 충분히 쉰다. 굳이 압박하지 않아도 내 성격상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닦달하지 않기로 했다. 어떠한 감정도 무시하지 않고, 떠오르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멈추기를 하고 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든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싫어했던 불안, 우울과 같은 감정들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인간이 가진 감정 중 좋은 감정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불편한 감정이 있다. 불편한 감정은 없앨 수도 없고, 없애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불편한 감정을 없앤다고 기분 좋은 감정만 남을까? 기분 좋은 감정은 불편한 감정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불안, 우울, 분노와 같은 불편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아, 내가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인정하면 떠오른 감정은 이내 사라진다. 신기하게도 감정도 자존심(?)이 있는지, 인정하지 않을수록 더 강렬하게 떠오른다. 감정을 마주 보면 내 현재 상태를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행동이든 하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불안이 올라오면 차가운 물을 마시거나 가볍게 시원한 바깥바람을 쐬고 나면 괜찮아진다.
전에는 올라오는 불안을 무시해서 감정이 더 커지고, 불안이 내 삶을 통째로 삼켜버릴 것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지행동치료의 '자동적 사고'를 배우고 나니 내 생각이 잘못된 자동적 사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불안을 다룰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고 나니 더 이상 불안이 두렵지 않다.
나는 심지어 불안과 친해지기로 했다. 불안이라는 감정에 내가 좋아하는 '곰돌이 푸' 이름을 붙여주었다. 불안이 올라와 가슴이 뛸 때면 '푸 왔구나? 오랜만이네' 하고 인사를 할 정도까지 됐다.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진짜다. 내 마음속의 '곰돌이 푸'는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나타나 나를 쉬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고, 산책을 하게 한다. 써놓고 보니 기특한 녀석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불안을 안고 산다. 불안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다. 단지 그 크기가 다를 뿐,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생각이 다를 뿐이다.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는 감각이 촘촘하고, 신체 감각에 대한 반응이 예민한 특성이 있다고 한다. 감각이 예민해서 생긴 불편함이니, 그 감각을 무디게 할 수 있도록 훈련이 필요하다. 불안한 감각에 대응하는 자동적 사고를 바꾸어야 하고, 불안한 감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신과 약은 이를 도와줄 수 없다. 나의 자동적 사고를 바꿔줄 수 없고, 불안한 감각을 무디게 해 줄 수 없다. 불안을 낮춰주는 항불안제는 감정을 요동치지 않게 도와주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불안의 작은 변화에도 예민해진다. 정신과 약은 내가 공황발작에 맞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 이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는 불안한 감각에 익숙해지기 위해 숨이 차오르는 운동과 명상을 했고, 자동적 사고를 바꾸기 위해 인지행동치료를 받았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혼자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혼자 해보다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추천한다. 학창 시절에 예습하고 나서 수업을 들으면 훨씬 좋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날 것이다.
우리는 기질적으로 불안에 예민한 사람들이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없앨 수도 없기에 평생 함께 해야 한다. 그렇다면 불안과 싸우기보다는 친구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 언제든 불안이 찾아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인사할 수 있도록, 불안과 익숙해지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