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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곤 별다방 May 08. 2024

엄마의 일은 계속된다

part 13 늦둥이 맘이자 경단녀의 구직활동 성공기

2020년에 동생이 태어난 우리 첫째는 초등학교에 입학도 못하고 팬데믹 상황을 지켜만 보다가 5월이 되어서야 온라인으로 겨우 초등학교 입학식을 치렀다. 그 아이가 어느새 2024년이 되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그동안 엄마와 아빠는 무엇을 했을까.


아빠는 사업을 하는데 2019년 가을부터 프로젝트가 하나 둘 연기되더니 결국 팬데믹 기간 내내 3년을 놀았다. 처음에는 출장이 잦던 아빠가 집에 있어 육아와 살림을 24시간 함께할 동지가 있어서 좋았다. 아빠의 사업은 몇 달 뒤로 일정이 잡혔다가 계획이 하나 둘 취소되더니 기약 없이 연기되기를 되풀이했다.


수입이 없어지자 사업을 하던 아빠에게 취직을 하라고 했더니 5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취직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는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나겠다 싶어 엄마가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이렇게 굶어 죽으나 나가서 벌다가 죽으나 마찬가지 일 것 같았다.


당신은 육아와 살림을 맡아요. 엄마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가서 벌어볼게요.

이렇게 아등바등 살다가 친구도 마음껏 못 만나고 죽으면 억울할 것 같았다. 어느 날 혼자 있던 차 안에서 우리 결혼식 때 부케를 받았던 친구가 생각나 전화를 걸어봤다. 도대체 언제 결혼할 거냐, 나도 네 예식장에 가보고 싶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통화를 하는데 친구의 고민이 귀에 들어왔다.


친구의 엄마가 치매에 걸린 지 10년째라고 했다. 친구의 엄마는 3살짜리 아기가 되어버려 오전에 주간보호센터에 셔틀을 태워 보내고 오후에 집에 셔틀을 타고 돌아오면 아빠가 엄마를 매일 돌보시고, 친구는 하던 사업을 꾸리기도 바쁘단다. 그래서 결혼이 자꾸 미뤄지더니 지금은 생각이 없단다.


우리가 결혼한 지 10년이 되던 시기였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지지고 볶는 동안 내 친구는 내색도 없이 치매에 걸린 엄마를 모시느라 바빴던 것이다. 갑자기 미안했다. 그 미안함도 잠시, 친구는 남편이 놀고 있으면 네가 나가서 벌어야지 뭐 하는 거냐고, 어서 이력서를 써서 돌리라고 했다. "지금 일할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힘든데 너도 나가서 일해야지"라고 한다. 같은 도시에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4시간이나 떨어진 도시에 사는 친구를 자주 만날 수 없어 아쉬웠다.


40대 중반의 늦둥이 엄마가 가질 수 있는 직업 몇 가지


0. 나이가 걸림돌이지만 할 수 있어


자영업을 하는 친구와의 통화를 뒤로 하고 자신감을 얻어 이력서를 작성했다. 첫째를 낳고 예전에 하던 일을 전공을 살려 취업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구인사이트에 들어가서 집 근처 매장의 구인광고를 살폈다. 구인공고 자체에 40세 미만 지원가능, 45세 미만 지원가능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불혹이 넘은 내 나이를 말하면 면접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를 말하지 않으면 면접 보러 간 곳에서 사장보다 내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결과 없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취업이 힘들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경력이 있어도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어버린 내 나이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던 일로는 취업도 안되고 아이들 물건을 중고로 사고팔던 '당근'앱을 뒤지고 있던 어느 날 '알바'탭을 발견했다. 집 근처 백화점 아동복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광고였다. 백화점은 환경도 깨끗하고 아동복이라면 내가 아이 둘을 키우고 있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근’ 어플로 몇 번의 클릭만에 백화점 알바를 지원하자 하루도 안되어 바로 전화가 왔다. 이력서를 들고 백화점 매장으로 오라고 했다. 2022년 결혼기념일이던 날 엄마는 아빠와 아이들을 집에 두고 면접을 보러 집을 나섰다. 다행히 백화점 아동복 매장의 매니저는 엄마보다 2살이 많았다. 이력서를 보더니 매니저가 말했다.


"혹시 오늘 바로 일할 수 있어요?"

"네"

"그럼 가방은 저기에 놓고 이것부터 도와줘요"

"네"


2022년 5월 5일 어린이날, 엄마가 일했던 백화점에 놀러온 아이들



1. 백화점 아동복 판매원 2달


2022년 2월 19일, 우리의 10주년 결혼기념일에 백화점 아동복 판매원 면접을 보았고, 그날 바로 백화점 알바가 시작되었다. 백화점 알바는 주말도 없이 일해야 했다. 주말에 일하는 대신 평일에 쉴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아이와 일정이 있어 일요일에 쉬어야 했는데 겨우겨우 사정을 말하고 다음부터는 주말에 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백화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 주말에는 8시 30분이면 문을 닫는다. 그래서 선택했는데 오픈시간보다 1시간 이상 먼저 출근해서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 다행히 백화점 퇴근은 칼퇴였다. 하지만 백화점 아동복코너는 참 한산했다. 근무도중에 손님이 없는 시간은 잠시 앉을 수 있어 좋지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한 달 뒤 매니저를 따라 갤러리아 백화점 광교점에서 현대백화점 판교점 아동복 매장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첫째가 3월 신학기에 등교수업을 며칠 하더니 코로나에 걸려왔다. 며칠 뒤 담임선생님은 자가격리 중인 아이들 3명을 모아 온라인 수업을 한다고 했다. 알고 보니 첫째가 앉은 뒷자리 친구 역시 코로나 확진이었다고 했다. 그사이 오미크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화점 근무 중에 목이 자꾸 따갑고 기침이 나서 조금 일찍 퇴근하고 병원에 들러 의사에게 코를 찔리고 키트로 검사를 했다. 엄마 역시 코로나 확진이었다. 4인 가족 모두 동시에 코로나에 감염되었다. 코로나에 걸리면 학교도, 어린이집도, 회사도 못 가고 모두 집에서 5일 정도 자가격리해야 하는 시기였다. 코로나 확진자에게 오는 보건소 문자를 받았다.


온 가족이 코로나에 동시에 걸려 버리니 일주일정도 집안에만 같이 있으면 되는 건 오히려 편했다. 사실 코로나가 점점 심해지는 초기에는 모두들 잠만 자느라 밥 생각도 없었다. 온 가족이 코로나라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을 걱정한 친정부모님이 장을 봐서 집 앞에 놓아두시면 4 가족이 끼니를 해결했다. 당시 코로나에 걸렸던 둘째의 쉰 목소리는 아직도 너무 안타깝다.


https://youtu.be/Do5tJHOY-6c?si=YLO0es7Y4MGzUkqW

코로나 확진 이틀 째 26개월 이었던 둘째, 외할머니가 사다주신 메로나


코로나를 극복하고 돌아간 백화점 알바는 이제 직원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했다. 부매니저라는 명찰도 생겼다. 하지만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아동복코너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매일 한가한 시간이 1시간 이상 있었던 갤러리아백화점 광교점과 너무나 달랐다.


굉장히 바쁜 매장에서 매니저와 직원 단 둘이 근무하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어느새 매니저와 식사시간으로 충돌이 생긴 이후로 4월 말까지만 백화점에서 근무하기로 했다. 백화점은 계속 서서 일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지하의 창고에서 물건을 찾아오고, 매장이 있는 곳에서 식당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으로 올라가야 하고, 매장 뒤의 창고에서도 물건을 빨리 찾아야 하는 등 이동이 많았다.


백화점에서 내내 서서 일하면서 신발을 몇 켤레나 바꿨는지 모른다. 운동화는 더워서, 어떤 건 바닥이 너무 얇아서 등등의 이유로 말이다. 일하면서 체력소모를 많이 하면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들과 놀아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판교는 집에서 멀었기에 퇴근하고 잠시 앉아서 멍 때리다 집에 오면 11시가 넘었다.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있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아침 7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백화점 부매니저
26개월에 온가족과 함께 코로나에 걸렸던 둘째, 목이 아픈지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2. 식당 서빙 4일


2달간 서서 일해야 하는 백화점 일을 그만두고 다음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맘카페에서 알게 된 식당알바를 찾아갔다. 보건증을 준비하라고 해서 피검사하러 다녀온 날부터 바로 일할 수 있었다. 그만큼 사람 구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식당일은 생각보다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아니 100석이 넘는 넓은 매장에 4명의 서빙 직원은 일손이 많이 부족했다.


음식이 나오면 손님에게 서빙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바쁜 매장이라 앉아서 쉴 틈이 없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매장관리하느라 바쁘고, 손님이 있으면 있어서 바빴다. 백화점은 깔끔하기라도 하지, 식당은 쓸고 닦는 일도 많고 심지어 퇴근하기 전에는 락스로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했다. 3일 정도 일했을 무렵, 백화점을 그만두기 전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까지 봤으나 소식이 없었던 콜센터에서 바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장 가겠다고 했다. 어디든 앉아서 할 일이 필요했다.


3. 산부인과 콜센터 전화상담원 1개월


결혼 전에 하던 콜센터 일을 다시 시작했다. 벌써 20년 전의 콜센터와 지금의 콜센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컴퓨터 모니터가 2대가 되었다. 전화를 걸고 받을 때 전화기 버튼을 누를 필요 없이 마우스 클릭 한 번에 전화를 걸고 받는 일이 가능했다. 20년 전 자유롭게 드나들던 인터넷 사이트는 회사 관련 업무 사이트 외에는 모두 차단되었다.


꽤 큰 산부인과 병원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직속 콜센터에는 팀장을 포함해 7명의 직원이 있었다. 모두 여자였다. 엄마는 산부인과 병원이라 아이 둘을 낳은 경력으로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요즘 산부인과는 아이를 낳는 문의가 아니라 아이를 갖는 문의가 많았다. 엄마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시험관시술과 정액검사 등등을 위한 안내가 많았다.


의사는 왜 이리 그만두는 사람이 많은지, 출근했다가 갑자기 안 나오는 의사도 있었다. 덕분에 환자들 예약을 모두 바꿔야 하고, 안내를 해야 하는 건 콜센터 직원의 몫이었다. 병원은 외워야 할 일이 많았다. 많은 의사들의 이름과 진료요일과 세부 진료분야 등을 외워야 했다.


오래전, 콜센터에 근무했었다는 이유로 경력직이라고 판단했던 팀장은 나에게 실망했다. 1달을 겨우 채우고 나왔다. 이제 무얼 해야 하나 싶을 때 한가닥 희망이 있었다. 병원 콜센터도 ‘당근’ 앱으로 구인했지만 막상 이력서는 '사람인'앱을 이용해 이력서를 제출해 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4. 유통업체 콜센터 전화상담원 3개월


1달간의 병원콜센터 업무를 퇴사하고 나오는 날 '사람인'앱을 열었다. 집에서 너무 먼 곳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싶어 집 근처 구인광고를 살폈다. 콜센터 구인광고가 엄청 많았다. 이번에는 유통업체 콜센터가 집 근처에서 구인광고 중이었다. 이력서를 냈다. 교육기간이 2주 정도 되고 수료하면 취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유통업체 콜센터에 취업했다. 유통업체이다 보니 주말에도 일해야 하고 명절에도 팀원들이 순번을 정해 출근해야 했다.


당시 아빠는 취업은 단념하고 육아와 살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엄마는 주말에 쉬지 않아도, 새벽 7시에 출근해 오후 11시에 퇴근해도 가능한 백화점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통업체 콜센터 근무시간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가 아닌 월급이 30만 원 정도 더 많은 오후 12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근무하는 시간대로 지원할 수 있었다.


유통업체는 배송이 관건이었다. 택배기사가 제시간에 안 간다면 컴플레인 전화가 걸려왔다. 주택은 문 앞이 대문 앞이 아니라 대문을 들어와 방앞까지 갖다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불만,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와서 불만, 물건이 상해서 불만, 2개인데 1개만 와서 불만이었다. 40대 여자들의 통화가 많았다.


가끔 배송기사의 실수인데 전화상담원이 욕을 처먹었다. 어떤 날은 전화상담원의 응대 말투가 불만이란다. 온 세상의 불만쟁이들은 모두 콜센터로 전화하는 듯했다. 그러다 남편이 그해 7월에 취업을 했다. 경단녀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더니 결국 취업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이 많은 자신도 취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남편이 취업을 하자 당장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케어할 사람이 없었다. 첫째가 하교한 뒤로 저녁을 챙겨줄 돌봄 선생님을 구하고,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하원하는 생활을 석 달 넘게 했다. 나는 육아를 위해 9시에서 6시 퇴근하는 일로 바꿔야 했다. 어느새 2022년 9월이 되었다. 12시에서 9시 퇴근하는 팀에 있던 나는 유통업체 콜센터에 근무시간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사직서를 쓰라고 했다. 퇴사이유는 ‘육아’라고 적고 나왔다.


5. 주말에 쉬는 직장


2022년 한 해에 엄마는 몇 번의 이직을 했던가. 이렇게 되짚어 보니 5번째 이직을 하고 지금까지 마지막 회사에 다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직한 회사에서 엄마의 나이는 중간이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모두들 육아를 하고 있는 엄마들이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1년이 지나서 육아휴직도 사용했다. 처음부터 이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찌어찌 돌아서 엄마는 평일에 적당한 시간에 근무하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쉬는 육아하기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2022년 7월 입사한 아빠도 여전히 직장을 갖고 있다. 의지가 힘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말이다. 뜻이 있다면 길이 열린다.


이렇게 엄마가 구직활동을 하고 취업을 하는 동안 미취학아동인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저녁을 매일 먹으며 하원했다. 저녁 식대비는 따로 내야 하는 시립어린이집에 매월 3만 원이 넘는 식비를 입금해야 했다. 둘째는 2022년 7월에 19회 저녁식사를 하고 야간 식대로 38,000원을 입금했다. 지금은 몇 천 원 정도의 저녁 식대를 내고 있다.


그 당시 시립어린이집에서 둘째가 저녁을 먹고 돌봄을 받지 않았다면 엄마는 구직활동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져 준 시립어린이집의 저녁식사와 야간보육 시간이 고마웠다. 그 당시 둘째의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을 비롯해 야간연장반 선생님, 원장선생님께도 따뜻한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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