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깨달음의 연속
서울 사당동에 쓰러져가는 군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시작하여 첫째를 키우고 위례로 이사를 해서 둘째를 낳아 기르면서 어린 아이들이 널찍하게 놀 수 있는 곳을 주말마다 찾아다녔었다. 서울숲, 올림픽공원, 한강변, 경복궁 등.
의정부를 거쳐 평택 생활 시작 후 꽤 말귀를 알아듣게 큰 아이들과 다같이 예전 많이 다녔던 서울에 종종 가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집을 제일 좋아하고 집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는 그녀이지만.
직접 찾아가서 축하해 줘야 할 지인들이 결혼을 앞다투어 서울에서 하다 보니 주말 막히는 경부 고속도로를 뚫고 악명 높은 양재 코스트코와 현대-키아 빌딩 있는 곳을 가다 서다 하며 서울을 가게 될 일이 있을 때 그녀는 주변 맛집리스트와 아이들 볼만한 뮤지컬이나 연극 또는 전시회 등을 계획하여 나름 패밀리 트립을 가곤 한다.
심지어 얼마 전엔 집 근처 평택지제역 앞에 2층 버스가 다니는 걸 본 첫째가 타보고 싶다고 해서 토요일에 온 가족이 버스를 타고 강남역에 가서 five guys 햄버거도 먹고 그 앞 알라딘 중고서점도 구경하고 왔다.
어느 날은 꽤 쌀쌀한 날씨에 경복궁엘 구경 갔다가 삼청동 거리를 걸어 차로 돌아가는 길에 호떡을 사 먹었다. 뜨거워서 두 개를 겹친 종이컵에 반을 접어 넣어 주셔서 먹는데 내 날카로운 이가 호떡의 어떠한 약한 표면을 찢으며 안에 있던 흑설탕+깨+꿀(이하 꿀이라 하겠다)이 망설임도 없이 낙하했고 내 외투가 그 꿀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주었다. 꽤 쌀쌀한 날씨에 꿀은 이미 알맞게 굳어 옷에 잘 달라붙은 형국이었지만, 뭐 호떡 안이 나오는 일이야 (호떡을 처음 먹는 미군에게 설명할 때도 주의사항 세 번째 안에 드는) 비일비재하니 나는 당황하지 않고 굳은 꿀을 보며 다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옷에 묻은 꿀은 약 20센티미터 정도의 긴 모습이었으나 차에 항상 휴대하고 있는 물티슈로 간단히 해결될 정도였다. 마침 외투의 겉감도 생활방수가 되는 재질이어서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뭐랄까, 긍휼히 여기는 듯한 눈빛이 스쳤다. 여하튼 호떡도 먹어야 하고 왜 그렇게 나를 보는지 물어볼 상황은 안되었다. 인파 많은 좁은 길을 각자 아이 하나씩 손을 잡고 가야 하기도 했고. 길가에 세워둔 차까지 약 50미터가 남은 상황이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편의점에 들어가서 물티슈를 사 왔다. 그리고는 간결하게 말했다. 닦아~
좀만 더 가면 우리 차에 물티슈가 있는데..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닦았다. 여러번 비벼서 닦으니 약간의 물자국만 남기고 제거됐다. 편의점 밖에서 왠지 낌새가 이상하여 호떡을 얼른 먹어 없앴고 닦은 뒤로는 물티슈를 종이컵에 넣어 구겼다. 차에 온 가족이 타고 휴지통에 종이컵을 버리고 네비에 집을 찍었다. 출발하려고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니 아까보다 즐거워 보이지 않고 감정이 싹 식은 느낌이 들었다. 뭘까.
“왜 그래?”
“뭐가?”
“왜 아무 말도 안해? 혹시 내가 호떡 흘려서 맘에 안들어?“ (꽤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 편)
“그걸 흘려서 옷에 길게 묻힌 그 모양이 너무 별로였어.”
“실수인데, 너도 떡볶이 먹을 때 옷에 흘릴 때 있잖아.”
“응. 나도 그럴 때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
(그녀는 아마도 칠칠치 못한 모습에 호떡꿀의 그 이미지, 그것도 부끄러워 하지는 않는 좀 보는 눈도 많은 가운데 루드해 보이는 내 가족, 반면 나는 그걸 남도 아닌 가족이 감싸주지 않는 서운함과 의도적으로 흘렸겠냐는 약간의 억울함의 감정이 순간 사로잡았다가 어느 정도 쿨 다운 된 후)
“너는 형상에 대해 상당히 예민한가보다. 시각적인 부분이 남보다 예민한 듯.”
“그런가봐. 나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
이번 사건은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비교적 대화의 처음 부분에 해서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나는 실수 후에 그녀가 늘 원하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한다. 그 말을 못하겠다. 그 대신 그녀에게 바란다.
‘말은 안했지만 이미 미안해 하고 민망해 하고 있는 나를 감싸주었으면. 부부니까. 너 아니면 누가 나를 감싸주니.’
그녀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잘못을 할 수 있고 가까운 부부 사이라고 해도 잘못을 했으면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다. 뒤끝없다.'
나는 왜 미안하다는 말이 바로 안나오고 대신 뭘 상대방에게 바랄까. 왜 내 감정에 대해 그녀에게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고 싶을까. 사과를 받아야 해결이 되는 그녀의 선제 조건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그랬던 이유와 뭐뭐, 블라블라 말하면서 시작하다가 나는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는 식으로 관점이 그녀에게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녀는 잘못한 사람은 너인데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고 오히려 피해자 같이 말하냐면서 그때부터 그녀의 감정에는 불이 붙는다.
나는 그녀를 그런 상태까지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미안하다고 말한다. 더 싸우는건 막아야 하니까.
그러면 그녀는 왜 진작 그 말을 하지 않고 기분 다 상하게 한 다음에 하냐고 한다.
싸움은 끝나지만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준 뒤 긴 침묵의 시간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내 생각과 좀 달라도 미안하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 사과를 신속히 받아주며, 미안하다고 하는 것 어려워 하는 사람이 미안하다고 해서 그녀는 고마워한다. 그러면 둘 사이에는 그 어떤 나쁜 감정이 없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신이 아닌데 어찌 열 길 모든 사람 속을 다 이해한다는 것인가. 교만하다. 또 교만하다.
그 동안 나의 삶은 내 마음이 어떤지를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뭐가 그리 억울하고 그리 꼭 남이 내 맘을 100% 알아야 하는가. 조금이라도 이유를 모르겠는데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 하면 그것만 신경쓰이고.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자기의 본심이 더 중요하다. 그 자존감이 멋있다. 큰 산 같다. 나는 촐싹대는 생쥐 같다.
큰 산 같은 그녀가 나에게는 필요하다.
그만 촐싹대 마흔두짤 이승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