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나들이 Apr 30. 2024

'엄마, 사랑해.'는 처음이야

태어나서 처음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기억 못 할 아주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하고 애교 부리는 아기였으면 좋았겠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엄마와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며 아버지의 불면증으로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니 일방적으로 쏟아냈습니다. 가능한 부드럽고 침착한 목소리로 나의 분출이 혹여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조심했지만 대책 없이 풀리기 시작한 두루마리 휴지처럼 공간 속에 하얀 말을 계속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그때 나한테 그렇게 했잖아. 어른이 그게 뭐야. 어른이 그러면 안 되는 거였잖아.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무서웠다고.


한참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도 모르게 쿵하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떨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가끔 엄마가 무섭고 독하게 변했던 순간이요. 그 순간 나는 엄마를 위로하지 못하고 모른 체하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걸 피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몸속에 숨겨진 모든 가시를 내놓고 상처받은 영혼을 보호하려고 했던 겁니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은 지친 영혼이 자신과 자식을 위해 가시로 남편을 공격한 거였죠.


"엄마, 엄마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독하게 변했던 거야. 이제 알겠어."


"맞다, 맞아. "


계속 이어진 긴 이야기 끝에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인생의 전성기는 지금야. 실버타운에서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지내고 취미생활도 하고. 몸도 더 건강해지고."


"참말로 맞다. 우리 딸은 엄마 마음을 알아주는 최고 보물이다."


엄마가 지금까지 내게 해주신 말 중 가장 눈부신 은유와 황홀한 비유를 담은 선물이었습니다.


"엄마는 네가 이렇게 알아주니까 이제 됐다. 우리 지나간 거는 다 잊고 살자."


"엄마, 나는 벌써 다 잊었어. 괜찮아. 근데 가끔 내가 아버지한테 이런 건 좀 고쳐달라고 말할 때마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그게 좀 힘들어."


"우리 딸은 열심히 하느라고 하지. 그런 생각할 필요 없다."


남편에게도 말했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요즘도 아버지의 말이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힘들어."

남편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너는 좋은 사람이야. 아니, 너는 훌륭한 사람이지."

그 말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좋은 사람이고 싶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었습니다.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다 보니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을 나 스스로가 찾게 되더라고요. 섣부른 위로보다 경청이 발휘하는 힘을 느꼈습니다.


엄마를 전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사랑해."

엄마도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도 많이 많이 사랑해."

고목나무뿌리처럼 두껍게 박힌 엄마의 상처와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니 애쓰지 않아도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이 세 마디를 하는데 49년이 걸리다니. 단지 세 마디지만 그 사람을 가슴깊이 이해하고 존재자체로 사랑해야 나오는 말이라서 그렇습니다.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건 전쟁 같던 엄마의 인생에 명예훈장을 걸어주고 경례를 하는 후배 군인의 마음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해'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

'나는 이제 당신이 가시를 세워도 그 가시가 따갑지 않고 가시 안의 여린 마음을 쓰다듬어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하지요. 엄마에게 인생은 매일매일이 크고 작은 전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엄마에게 아빠와 잘 지내시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도 넘은 훈수 같은 거였으니까요. 그저 "엄마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를 다 이해합니다."하고 이야기할 겁니다. 엄마의 감정을 존중할 겁니다.


우리 아들, 딸에게 사랑한다 말할 때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이렇게 큰 지 몰랐습니다. 그때의 '사랑해.'는 달콤한 사탕을 나눠 먹는 것이었습니다. 50이 다 된 내가 70이 넘은 엄마에게 처음 말하는 '사랑해'는 그녀의 인생을 사랑한다는 말이라서 더 깊습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인내를 존경한다는 말이라서 더 소중합니다. 내 안의 나무가 쉼 쉴 수 있는 공기가 되어주고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되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 더 애절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해'는 단순히 세 마디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와 내가 엄마와 딸로 만났던 백년의 세월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사랑해


엄마, 사랑해

이전 21화 행복한 인연을 만들어준 그녀 테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